[한경잡앤조이=강홍민 기자] 해가 어슴푸레 지고 있는 초여름 저녁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이 양 볼을 스쳤다. 우리는 테라스에 앉아 맥주잔을 부딪쳤다. “복치야, 여자친구랑 계속 만나야 하는걸까? 이젠 그만하고 싶다. 정말” 근 2년 만에 만난 A였다. “으응.. 글쎄. ” 내가 말끝을 흐리자, A는 고개를 갸우뚱하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옅은 미소에도 오른쪽 뺨에 핀 보조개가 도드라졌다.
A는 체육관에서 만난 친구였다. 처음엔 비슷한 시간에 가끔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지만, 나는 A를 처음 본 순간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반달 눈매에 말할 때마다 씰룩이는 보조개, A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다 뒤풀이 때 동갑내기인 걸 확인한 후 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는 사람과 마주치는 게 이토록 반가울 일인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상 때문에 체육관을 그만뒀을 때도, A와 완전히 소식이 끊기진 않았다. SNS 친구였던 우리는 언제든 서로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게시물에 가끔 ‘좋아요’를 주고받기도 했다. 같은 체육관 친구에게 A의 근황을 들을 때도 있었다. 따로 연락하며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생경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카톡은 갑작스러웠다. A는 여자친구 심리를 모르겠다며, 나랑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으니 내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A와 여자친구 반씩 편을 들며 적당한 선에서 대답을 해줬을 때 A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복치야, 우리 그냥 만나서 얘기하는 건 어때? 맥주 한잔하자.”
그날 이후 우리는 퇴근 후 종종 술잔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A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다가, 회사, 근황, 취미, 서로의 친구들 얘기까지 함께 나눴다. A는 볼 때마다 새로운 구석이 있었다. 생각보다 공감 능력과 기억력이 뛰어났다. 내가 SNS에 올린 피드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다. 내 친구들 이름은 물론,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까지 세세히 기억했다. 대화를 나누다가도 “아 그 친구말야? 알지 알지” “정말?”과 같은 자동 추임새를 넣으며 알은체하기도 했다.
A는 여자친구와 헤어질 각오를 매번 다지곤 했는데, 이후엔 꼭 내 연애사로 대화 주제를 옮겨갔다. "복치야, 썸남이랑 진짜 잘해볼 생각이야? 넌 너를 알아주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 나처럼 말야.” A 말에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그 당시 만나고 있던 썸남과 서서히 거리를 두게 됐다. A는 어느덧 내 이성 관계의 잣대가 되고 있었다. 썸남과 달리 A와는 같은 시공간에서 취미생활을 함께했고,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A는 좋은 사람 같았다. 다정다감하고 사려 깊으며, 바르고 건실한 (거기다 훈훈한) 청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A와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아니었다. 사실 뭘 해 볼 재간이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다 끝났어. 복치야. 이제는 진짜 나랑 잘 통하는 사람, 좋은 사람이랑 만나고 싶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올 즈음, A가 이별 소식을 전했다. 나는 볼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정리하며 맥주잔을 응시했다. “그래도 얼마간의 애도 기간은 필요한 거 아니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A가 답했다. “아니. 사람은 사람으로 잊어야지. 그래서 말인데, 복치야. 너 혹시.. 나..”
혹시? 우리는 최근 급속도로 서로에 대해 깊이 알아갔다. 일상을 나누고 내밀한 속마음을 털어놨다. A의 다른 친구가 모르는 최근 근황부터 이별의 순간까지, 나는 그의 가장 최측근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A가 다른 사람과 더 친밀해 보이면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A를 더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오르고 있다는 걸, 애써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A는 볼에 바람을 넣었다 빼면서 맥주잔을 만지작거렸다. 뜸 들이며 말할 때 A의 습관이었다."복치야, 있잖아, 나 말이지. 아니다.” 심장이 자진모리장단으로 뛰기 시작했다. 궁금증과 불안함, 설렘이 뒤섞였다. “뭔데? 난 괜찮으니까 말해봐.” A가 보조개를 씰룩거리다 입을 열었다. “복치야, 나.. 네 친구 있잖아. B 그 친구 좀 소개해주면 안 될까?”
A 뺨이 붉게 물들었다. 다리까지 달달 떨고 있었다. 술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이건 수줍음이 몸을 주체하지 못해 삐져 나온 동작들이었다. A는 나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을 풀어놨다. “예전에 왜 우리 체육관에 B 잠깐 놀러왔을 때, 그때 잠깐 보긴 했거든. 그리고 네 SNS 타고 들어가 봤는데, 나랑 취향도 비슷하고 볼수록 내 스타일이야. 부탁한다. 복치야.” A는 전에 없던 다급한 말투로 지금 바로 연락을 해보라며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카톡창에서 B를 찾았다. 메시지를 치는 손가락이 천근만근이었다. B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답했다. 카톡창을 함께 보던 A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풀이 죽었다. 길 건너 치킨집 앞 풍선 인형이 A를 놀리는 듯이 신명 나게 춤을, 아니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나는 그런 A를 보며 오징어 다리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날 이후 A와의 연락은 서서히 뜸해졌다. 여기저기서 A가 소개팅 시장에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A와의 시간도 곱씹었다. A가 열심히 누른 내 SNS ‘좋아요’는 온통 친구 B와 찍은 것들이며, 그 녀석의 빛나는 기억력과 섬세함은 내가 아닌 B를 향한 걸 말이다. 나의 일상보다는 B와의 일들이 궁금했기에 질문을 던져왔을 것이다. 어긋난 화살표가 뒤늦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유독 무더웠다. 문밖을 나서면 습식 사우나에 들어간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찐득한 더위를 못 견뎌서 이기도 했지만 어긋나 버린 화살이 돌고 돌아 마음에 박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동안 A가 입을 뗄 때 뭔가를 기대하며 그를 바라보던 어느 여름날의 내가 머릿속에서 무한 재생됐다. 일정 수준 이상의 호의와 배려로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 A에 착각 방조 및 헛다리 유도죄도 묻고 싶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즈음, A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다. 덩달아 스스로를 괴롭히는 기억 재생도 중단됐다. 식상한 말이지만 시간이 약이기도 했고, 나름의 정신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A를 처음 본 순간 그의 보조개에 빠져 허우적댔고, 보고 싶은 것만 봤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나와 B와의 일들을 지나치게 꼼꼼히 묻던걸 나에 대한 관심으로 생각하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A의 보조개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내가 아닌 B를 향하는 마음을 흐린 눈으로 흘려 보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결국 이 모든 총합이 ‘나’일텐데, ‘외면하거나 부끄러워해서 무얼하나, 나라도 응원을 보내야지 ‘ 하고 마음먹은 순간 한결 평온해졌다.
다시 여름 바람이 불어온다. 유복치의 오답노트를 작성하는 올해는 다른 기억을 덮어쓸 수 있길 바라본다. 돌고 도는 마음의 화살이 누군가의 마음에 명중하는 그날까지, 이번 여름엔 차이지 말아야지…
필명 유복치. 유리멘탈 개복치의 줄임말이다. 취미는 입덕, 특기는 덕질인 n년차 스타트업인이다. 좋아하는 대상에 온마음을 쏟으며 살고 싶지만,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 깨질지 모르는 멘탈을 부여잡다 보니 2보 전진, 1보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부분 차인 날 투성이지만, 한 걸음씩 발걸음을 떼다 보면 두려움 마저도 함께 나누고 싶은 소중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산다. 그래서 오늘도 차이거나, 차인 날을 회상하며 까무룩 잠이 든다. 내일은 차이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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