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9년 6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인해 전기 왜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본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 주민들과 왜구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강온양면 정책을 폈다. 하지만 왜구는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부산) 왜변, 1555년에는 을묘왜변(강진·진도·영암)을 도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왜구가 침략한 내용이 312건이나 나온다.
이 무렵 동아시아에서는 ‘후기 왜구’들이 발호해 주로 중국 해안을 침략하고 약탈했다. 1368년 건국된 명나라는 1371년 주민들이 바다로 나가는 행위를 막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 민간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푸젠성·저장성·광둥성 등 해안에 견고한 성을 쌓고, 군사를 양성했다. 군선도 건조해 곳곳에 배치했다. 이런 해금정책은 300년 이상 존속되다가 1684년에야 폐지됐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원나라를 멸망시킬 때 적대적인 관계였던 장사성 등의 해양 세력이 성장하고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였다. 또 명나라는 이민족인 원나라와 달리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이라는 전통적인 중화주의 체제를 복원하고, ‘해양과 무역’이 아니라 ‘내륙과 농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왜구의 발호 때문이었다. 명 정부는 책임을 물어 1386년에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와 무역을 금지했다. 이후 1392년 무로마치 막부(1336~1573년)가 왜구를 진압하자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 1404년부터는 조공무역 체제인 ‘감합무역’을 허락했다.
일본은 조공선을 파견해 금·은·구리·유황·철·도검 등을 수출하고, 비단(생사)·동전·도자기 등을 수입해 때로는 5~6배에 달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민간인들은 밀무역할 수밖에 없어 해안가 주민과 상인들은 해적 집단과 연계되거나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일본은 상업과 산업이 발달했고, 무역선들이 동남아시아에서까지 활동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523년 사용을 허가받은 영파항에서 일본 지방 세력이 파견한 사절단이 무역상 이권을 둘러싸고 큰 싸움을 벌였다. 당연히 명나라는 일본과의 무역을 금했고, 이 ‘영파의 난’을 계기로 후기 왜구가 발생했다고 한다.
왜구들은 해역의 자연환경과 물류체계에 정통했고, 선박을 능숙하게 운행했다. 일본 무사 출신이 많았고, 조총 등 신형 무기를 사용해 무장력이 매우 뛰어났다. 1547년에는 대규모로 파견된 정부의 진압군도 패배했을 정도다. 왜구들은 1553년부터는 보통 200~300척이 모여 선단을 이뤘다. 대마도, 이키섬, 규슈 북부의 마쓰우라, 오도열도, 히라도, 유구, 대만, 영파, 주산군도, 해남도 등을 근거지로 중국 해안은 물론이고, 일본과 조선의 연해도 공격했다. 이후 동남아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렇게 되자 명나라 내부에서는 오히려 해금정책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척계광은 조선에서 군사훈련에 활용한 병서인 《기효신서》의 필자인데, 1555~1567년 왜구를 대대적으로 토벌했다. 또 정부는 1567년엔 푸젠성을 제한적으로 개항해 동남아나 포르투갈 등과 무역하는 일을 허락했다. 그 여파로 왜구들의 활동은 주춤했다. 하지만 근절되지 않았으므로 일본과는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후기 해적은 어떻게 구성됐을까. 나라마다 해석이 다르지만, 《명사(明史)》 일본전에는 ‘대체로 진짜 왜는 10분의 3이고, 왜를 따르는 사람은 10분의 7이다’고 기록됐다. 일부 왜구와 대다수 중국인, 지역에 따라서는 약간의 조선인도 있었다. 《세종실록》에는 1446년 조에 나라 백성이 왜구 옷을 입고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있다. 1587년에는 변경의 백성들이 왜구와 내통해 전라도의 손죽도를 공격한 사건도 발생했다. 그런데 왜구 집단에는 포르투갈인과 에스파니아인도 있었다. 따라서 왜구는 단순한 왜인 해적을 넘어 중국인이 주가 된 다국적 상인집단으로 확장 변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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