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낳은 사람은 엄마야. 넌 내 배 속에 있었어.”
“아니야, 난 아빠 배 속에 있었어.”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는 제왕절개 수술 자국을 증거로 삼았지만 믿지 않았다.
“어떻게 여자 몸에서 남자가 나올 수가 있어?”
남자는 남자가 낳고 여자는 여자가 낳는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 말을 듣는데 묘하게 설득이 되었다. 그러게? 어떻게 여자 몸에서 남자가 나올 수 있지? 하지만 나는 아이를 밴 몸으로 피를 토할 때까지 입덧을 했는데…. 심지어 나의 등단작은 ‘뇌 태교의 기원’이다. 그런데 이제 그게 다 말이 안 되는 일 같다. 당연하게 여긴 것마다 아이가 의문 부호를 달아 놓은 덕분이다. 이런 전복의 순간을 나는 시적인 순간이라고 느낀다.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던 날, 나는 밤늦게까지 서울 을지OB베어에 있었다. 얼마 전 강제 철거된 을지OB베어와 연대하는 현장 잡지 ‘월간 단골’의 낭독을 위해 작가들이 모인 자리였다.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생긴 문제는 하루 이틀이 아니고, 자본은 언젠가부터 작고 다양한 가게들을 집어삼켜왔다. 경리단길의 테이크아웃드로잉과 서촌 본가궁중족발에서 일어났던 일이 장소만 바꾼 채 반복되고 있다. 우리의 목소리가 가 닿는 곳이 있기는 한 걸까?
바리케이드가 쳐진 맥줏집 안에서 건너편 만선호프를 바라보며 시를 읽을 생각을 하니 온몸이 떨렸다. 만선호프는 야외 테이블까지 손님들로 만석이었다. 아무도 우리에겐 관심이 없는데, 겨우 열 명을 넘긴 작가들이 술로 하나 된 무관심을 이겨낼 수 있을까? 떨리는 목소리로 권창섭 시인이 오프닝 멘트를 시작했다. 그는 격양된 감정 때문인지 자꾸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기가 노가리 골목인지 만선호프 골목인지 궁금하시다면 검색 한번 해 주십시오. 지금 당장 검색 한번 해 주십시오. 저희는 그 사이에 글을 읽겠습니다. (…중략…) 방문해 주세요. 뮌헨호프도, 썸호프도, 영동호프도, 을지로호프도, 우리호프도, 수표교호프도 그리고 을지OB베어도….” 권 시인이 또박또박 힘주어 발음하는 작은 맥줏집 이름들이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별처럼 반짝인다.
인도 출신의 세계적 석학인 가야트리 스피박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저서 《읽기》에서 “평서문에 의문 부호를 다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임무”라고 거듭 강조했다. 나는 법에 따라 쫓겨난 이들이 다시 법을 전유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단지 버텨냄으로써 제한된 구역에 거주하기가 가능해질 수도 있을까?
이날, 유현아 시인이 낭독한 김현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사무친다. “누나의 생일에는 누나의 집이 무너졌고/ 제 생일에는 저의 집이 무너졌습니다.” 우리의 집은 무사한가? 함께 무너질 수 있는 상상이 가능하다면, 서로를 일으키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어느 밤 아이와 함께 걷던 길, 아이가 작은 별 두 개가 자꾸 자길 따라온다고 신기해했다. “엄마, 내가 집으로 들어가서 문을 꽝 닫으면 별이 땅바닥에 떨어질지도 몰라. 어떡하지? 그러면 별이 찌그러질지도 몰라.”
문을 닫을 때마다 생각나는 아이의 말이다. 천연한 말이 가진 힘은 놀라운 것이어서 문을 닫을 땐 별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한다. 문 뒤에 아이의 자유로운 생각이 출렁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골목의 백년가게라는 인증이 무색하게 골목의 정체성을 만들어온 가게들이 사라져간다. 뒤가 사라져 간다. 어떻게 뒤 없이 앞이 있을 수 있나.
천양희 시인은 종소리의 뒤편에서 무수한 기도문을, 화려한 마네킹의 뒤편에서 무수히 꽂힌 시침핀을 발견했다. 나는 42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지켜온 작고 다양한 노포들에서 역사의 굴곡을 만드는 시침핀을 본다. 그리고 걱정한다.
골목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골목의 뒤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반짝이던 맥줏집의 이름들이 하나둘 땅바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누군가의 마음 한 귀퉁이도 찌그러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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