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만 이용할 수 있었던 ‘숙녀금고’는 왜 만들었을까요?”
이기정 우리은행 과장(학예연구사)이 질문하자 주니어 생글생글 기자들이 하나둘 손을 들었다. “남녀 차별이 심했나요?” “여자들이 돈이 많아서요.” 이 과장이 “6·25전쟁과 관련이 있다”고 힌트를 줬다. 주니어 생글 기자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지난 10일 주니어 생글 기자 11명이 서울 소공로 우리은행 본점에 있는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을 찾았다. 한국의 은행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소다.
1950년대 전쟁으로 수많은 남성이 사망하거나 다친 뒤 여성들의 경제 활동(돈을 버는 일)은 한층 활발해졌다. 당시 북한에 있던 여러 점포와 자산을 잃은 우리은행은 고객의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여성들이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드나들면서 비밀도 보장받을 수 있는 여성 전용 은행 점포(숙녀금고)를 생각해 냈다.
우리나라 은행의 역사는 한국의 근대 역사와도 연결돼 있다. 조선 후기 시장을 중심으로 엽전 등 화폐가 많이 쓰이기 시작했고,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우리나라 주요 항구가 열리면서 일본계 은행이 국내에 진출했다. 외국 자본에 맞서 우리의 경제권을 지키겠다는 뜻을 가진 서울·개성의 상인과 관료(공무원)들이 민족 은행(우리나라 자본으로 만든 은행)을 설립한다.
이 은행을 세울 때 고종 황제도 돈을 냈다. 바로 1899년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이다.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란 뜻인데, 세월이 흘러 이 은행은 지금의 우리은행이 됐다.
?금융실명제 도입, 신용카드의 등장,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등 쉽지 않은 우리나라의 금융과 경제 역사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by 문혜정 기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은행’ 하면 돈을 맡기는 곳, 저축하는 장소 정도로만 여겼다. 경제 공부를 하며 은행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은행은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곳이었다. 은행은 돈을 맡아 주고 빌려주고 환전도 한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 기업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고 한다.
6·25전쟁 때 여자들만을 위한 ‘숙녀금고’가 생겼다는 사실도 재밌었다. 돈을 세는 기계가 없던 예전에는 돈 세는 일만 하는 직원이 몇십 명이나 따로 있었다는 얘기도 흥미로웠다.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지하 2층에 있는 저금통갤러리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모양의 저금통이 전시된 곳이다. 저금통 하면 돼지 저금통이 유명하다. 그 이유가 중세 시대엔 점토 항아리에 돈을 저장했는데, 그 점토의 명칭인 ‘피그(pygg)’가 ‘돼지(pig)’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돼지 저금통이 유명해졌다는 얘기도 참 재미있었다.
이번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취재에서 한국의 은행 역사에 대해 여러 새로운 정보를 알게 돼 좋았다. 다만 세계 은행의 역사에 대한 설명은 따로 없어서 아쉬웠다.
은행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민족이 현재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이다. 과거 그들은 여러 이유로 직업적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유일하다시피 할 수 있었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업’이었다.
시간이 지나 이탈리아에선 고리대금업이 체계화돼 은행업이 됐다. ‘creditor(채권자)’와 ‘cash(현금)’ 등 영어 단어의 유래가 된 이탈리아어 ‘creditore(크레디토레)’와 ‘cassa(카사)’ 같은 금융 용어도 생겨났다. 15세기에는 교황청이 은행업을 인정하면서 귀족과 왕족도 은행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유럽 경제를 손에 쥐고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대계였다. 유대인은 지금까지 금융업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영국은행, 미국 중앙은행(Fed) 등에서도 유대인들이 큰 영향력을 가진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