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대선을 전후해 ‘킹크랩 사건’으로 불리는 댓글조작 사건을 일으켜 유명해진 일명 드루킹(김동원). 드루킹 일당의 목표는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재벌기업을 인수·합병해 얻은 수익금으로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2018년 10월 열린 댓글조작 사건 첫 공판에서 특별검사팀이 공개한 내부 문서와 진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드루킹이 운영하던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 규약에는 “정치적 비밀결사체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재벌을 대신해 기업을 소유하면서 국가와 소통하고, 한민족의 통일을 지향하며 매국노를 청산한다”고 결성 이유를 밝혔다. 그들의 목적 중 하나가 ‘기업 소유’임이 명백해졌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드루킹이 택한 수단은 ‘국민연금’이었다. 당시 외부용으로 만들어진 경공모 설명자료에는 “대선에 승리해 정권을 장악하고, 국민연금공단을 통해 재벌 지배 및 구조 변경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있다. 바로 ‘연금 사회주의’의 구현이다. 국민연금의 막대한 적립금으로 주식회사 지분을 매입해 사회화를 추진한다는 의도였다. 그들은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에 접근한 것이다. 노 의원이 차기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서다. 드루킹 일당은 노 의원에게 돈을 건넸고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드루킹의 국민연금 장악 시도가 미수에 그친 건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국민연금이 드루킹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 초래될 결과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국민연금 운용자산 규모는 900조 원을 넘는다. 코스피 시가총액(약 2000조원)의 45%에 달하는 규모다. 이론상 국민연금 운용기금을 모두 국내 주식시장에 쏟아 부으면 대부분 코스피 상장사를 소유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 국내 코스피·코스닥 상장사 가운데 국민연금이 10% 이상 지분을 가진 상장사는 48곳,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상장사는 250개가 넘는다.
국민연금은 주식 뿐 아니라 채권과 외환시장에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치솟은 가운데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가 환율 급등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국민연금은 매년 200억~300억 달러 이상을 해외 주식과 채권에 투자한다. 한국의 지난해 연간 무역흑자 295억 달러와 맞먹는 규모다. 국내 채권시장에서 국민연금 보유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15% 안팎에 달한다. 마음만 먹으면 자본시장 전체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 더욱이 국민연금 기금은 계속 불어나 2043년께 2500조원대까지 커질 전망이다. 단순한 자본권력을 벗어나 드루킹의 뜻대로 한국 대기업은 물론 경제 지형도까지 바꿀 수 있는 공룡이 된다. 이 같은 무소불위의 힘은 모든 정치권에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단일 기금으로 국민연금이 국민경제와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크다. 하지만 지배구조는 글로벌 기준에서 가장 엉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권력이 보건복지부 산하 국민연금공단에 맡겨져 있다. 국민연금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는다.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구성을 봐도 정부 영향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정부 의도대로 국민연금이 운영될 여지가 크며, 정치권에 휘둘리기 딱 좋은 구조다. 누군가 목적을 갖고 국민연금을 휘두른다면 그 결과는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 국민연금 지배구조 개혁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 첫 시정연설에서 “연금·노동·교육 개혁은 지금 추진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게 된다”고 말해 이들 3개 분야를 중심으로 집권 초부터 강한 드라이브를 걸 것임을 시사했다. 3개 분야 개혁 화두 중 연금을 첫 번째로 꼽았다. 그러면서 "지속 가능한 복지제도를 구현하고 빈틈없는 사회 안전망을 제공하려면 연금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연금 개혁은 고갈이 예정된 기금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지배구조 개혁이 동반돼야 한다. 정치세력이 무소불위의 자본권력을 입맛에 따라 휘두를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려면 말이다. 지난 정권에서 시행된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 주주권 행사 지침)도 그런 시도의 일단이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독립을 위해선 기금운용 자체를 시장에 맡기는 게 근본 처방이다. 주식시장 투자금을 잘게 쪼개 국내외 자격 있는 민간 운용사들에 위탁하는 방식이다. 국민연금과 성격이 비슷한 일본 공적연금 GPIF는 위험이 적은 국채 등 채권투자를 제외한 모든 주식을 은행신탁이나 민간 운용사들에 맡겨놓고 있다. 국민연금 역시 외부 위탁 운용 비중을 늘리는 추세지만, 아직 절반 이상을 직접 굴리고 있다. 모든 운용 자산을 외부에 맡기고 손을 터는 게 역설적으로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독립성과 수익성을 담보하는 길이다.
유병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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