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18세기는 ‘위대한 세기’ ‘찬란한 세기’ 등 긍정적인 이미지가 보통 따라붙는다. 절대왕정과 계몽주의, 시민혁명의 시대라는 프리미엄이 적지 않은 것이다. 또 이때는 꾸준한 경제발전이 이뤄진 시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식민지 개척에 따른) 생활공간 확대와 식량 증대의 시기’로도 불렸다. 최근에는 이 기간을 소비혁명이 발생한 시기이자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의 때로 보기도 한다.
그 결과 인구도 증가했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라 차이가 크긴 하지만, 18세기 100년 동안 유럽 인구는 9500만 명에서 1억46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세계 인구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도 1700년 17~18%에서 1800년에는 20% 수준으로 높아졌다. 1700년 70~80만 명으로 추산되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수는 1789년 대혁명 직전에는 230만 명까지 늘었다. 전체 인구 증가율을 훨씬 웃도는 자본가 계층의 증대는 상업의 발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괄목할 만한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에선 자연환경이 인구를 조절하는 ‘맬서스적 인구조정’이 두 번이나 크게 작동했다. 농경사회에서 인류는 굶주림을 피하기 어려웠다. 농업 생산은 토지개간이나 토지개혁, 영농기술의 발전 등에도 불구하고 인구보다 훨씬 천천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1740년대 초와 1770년대에 걸쳐 대규모로 사망자가 급증하는 ‘인구 청소’가 단행됐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유럽의 인구증가율은 1600~1650년 6.2퍼밀(천분율·‰), 1650~1750년 2.4‰, 1750~1800년 4‰로 추산했는데 이는 순환적 인구 감소 현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중 첫 번째 맬서스의 함정 물결이 휩쓴 1740년대 풍광은 매우 스산하다. 1740년대 들어서면서 유럽에는 사망률 증가라는 큰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갔다. 1740년에는 유럽 대륙 전체에서 전년에 비해 사망자 숫자가 21% 늘었다. 1742년에는 기록된 사망자 수가 1739년에 비해 24% 증가해 정점을 이뤘다. 이는 인구 위기 발생 전인 1735년에 비해 사망자 수가 43%나 늘어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서유럽과 북유럽, 중부 유럽에서 흉작이 발생했다. 1693~1694년, 1708~1709년, 1740~1741년은 대흉작의 해로 기록됐다. 기상재해와 재난도 잇따랐다. 1700년대 초에는 도처에서 곡물가격이 크게 올랐다가 급락하곤 했다. 한번 폭락한 가격은 쉽게 오르지 않아 차지인(땅을 빌려 쓰는 사람)들이 차지료를 낼 수 없을 정도여서 농지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1740년대를 앞두고는 도처에서 곡물가가 일방적으로 인상됐다.
2.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맬서스의 말을 현대적 관점에서 비판해보자.
3. 18세기 유럽에서 사망자가 급증한 이유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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