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 역주행"…삼성 '고졸신화' 양향자 의원의 탄식 [정지은의 산업노트]

입력 2022-05-20 10:36   수정 2022-05-20 14:39


“반도체 인재 양성, 경쟁국은 뛰는데 우리는 역주행하고 있다.”

삼성전자 출신 양향자 무소속 국회의원(광주 서구을)은 20일 이같이 말했다. 양 의원은 삼성전자 고졸 직원 중 처음으로 여성 임원에 오른 ‘고졸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광주여상 졸업 직후 삼성전자에 입사해 줄곧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일했다.

양 의원은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 벌어지는 인력난, 국가 연구개발(R&D) 투자 부족 문제 등을 심각하게 들여다봐야 한다며 기고문을 전해왔다. 아래는 양 의원이 “더 늦기 전에 꼭 반도체 현실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며 보내온 글이다.
○흔들리는 반도체 산업 경쟁력
반도체 산업은 육상경기와 같다. 가장 빠르게 최첨단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 승자의 영광을 독차지한다. 최첨단 반도체는 제품의 경량화, 효율화, 비용 절감을 가능케 한다. 최신 전자 제품에 철 지난 반도체를 넣고 싶은 기업은 없다. “2030년 반도체 시대는 슈퍼 무어 법칙의 시대가 될 것”이라며 2030년까지 반도체 1나노 공정 개발을 공언한 대만 행정원(한국의 국무총리실)의 발표가 우리에게 위협적인 이유다.

반도체 1나노 공정은 회로의 선폭이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에 불과한 최첨단 초미세 공정이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1나노 공정에 먼저 도달하는 자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제패한다’고 말한다. 대만은 ‘반도체가 대만의 안보를 보장한다’는 차이잉원 총통의 철학 아래 정부가 직접 반도체 기술 개발을 진두지휘한다. 대·중소기업을 아우르는 반도체 연구 생태계 조성, 파격적인 금융·세제 혜택과 더불어 대만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바로 반도체 인재 양성이다.


반도체 인력의 미스매칭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하다. 글로벌 산업 트렌드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수년 전부터 소프트웨어나 인터넷 기술을 배우려는 학생들은 크게 늘어났지만, 반도체 등 제조업 관련 전공을 택하는 학생들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각국은 반도체 산업의 성패를 가르는 인재 양성을 더 이상 기업만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적 어젠다로 인식하고 있다. 대만은 가장 발 빠르게 대책을 내놨다. △매년 1만 명 규모의 신규 반도체 인재 양성 △1년에 두 번 신입생 특별 선발 △학사 정원 10%, 석·박사 정원 15% 확대 △기업·대학 협력 반도체학과 개설 등 과감하고 파격적인 대책을 이어가고 있다. 예원콴 대만반도체연구소장은 “대만의 생명줄을 먼저 붙잡지 않고서 대체 어떻게 대만 경제를 발전시키겠는가”라고 말했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반도체 산업계 부족 인력은 1621명이다. 하지만 반도체 관련 학과 졸업생은 650명에 불과하다. 반도체 연구와 개발을 진행할 석·박사급 인력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인재 양성·R&D 지원 부족…정부 외면 탓
반도체 분야의 인력 부족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화한 것은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기업 스스로 잘하는 분야로 간주하고 인재 양성과 연구개발 지원을 외면해 온 탓이 크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반도체 R&D 국책사업 예산은 한 푼도 없었다.

심지어는 정부와 민간이 10년간 3500억원을 투입해 반도체 고급 인력을 양성하는 사업의 예산이 애초 계획보다 40%가량 삭감될 것으로 알려졌다. 예산이 줄어들면 반도체 전문인력양성 목표도 하향 조정해야 한다. 이대로는 도저히 반도체 업계가 필요로 하는 인력 수요를 따라갈 수 없다. 정부가 반도체 인력양성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몇 년째 국책 R&D 지원조차 없는 상황에서 민간기업의 투자만으로 어떻게 경쟁국을 따라가겠는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민관 합동으로 ‘국가반도체기술센터(SRC)’에 연간 3억 달러(약 3812억원)를 투입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국내총생산(GDP)의 3% 이상을 반도체 연구개발(R&D)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경쟁국은 달리는데 우리만 역주행하는 형국이다.
○“尹 정부 과감한 지원 필요”
반도체는 우리에게도 생명줄이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책임지는 최대 수출상품, GDP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산업에만 그 의미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4차산업혁명 시대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반도체가 판가름한다. 앞으로 펼쳐질 반도체 패권 경쟁은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우리의 미래가 걸린 싸움이다. 그런데 반도체 경쟁이 이제 더 이상 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 국가 간 패권 경쟁이라는 사실을 우리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S급 인재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은 이제 반도체뿐 아니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관통하는 말이다.

윤석열 정부는 미래산업 인재 양성, 과감한 인센티브 제공 등을 통해 반도체의 초격차 확보는 물론 신격차까지 창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 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인력양성 사업을 정상화하는 것은 물론 과감하게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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