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정의 같은 가치를 무시했다는 등 윤 대통령의 ‘자유론’에 대한 비판도 다양했다. 이 가운데 “시장은 자유와 폭력이라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건 만고의 진리”라는 비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유의 가치를 희석화하고 정치를 중시할 우려 때문이다.
우선 주목할 것은 윤 대통령의 자유론이 전제한 정치관이다. 윤 대통령은 “초저성장과 대규모 실업, 양극화의 심화” 등과 같은 경제 문제의 해법을 정부 주도의 정치가 아니라 시장 주도의 자유에서 찾고 있다. “정치는 ‘반지성주의 성격’ 때문에 효과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정치의 그런 성격을 문재인 전 좌익 정권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정권은 반지성주의의 진영 논리에 따랐다. ‘우리 진영’에 대한 편향적 정책을 통해 집권에만 매달리는 게 정실 국가의 반지성주의다. 자기 진영을 지지하는 노조 세력은 떠받들고, 소득을 늘리고 일자리를 낳는 기업은 ‘그들 진영’이라는 이유에서 각종 규제로 얽어매 압박했다. 우리 진영을 위해서라면 거짓·통계 조작·선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 진영은 적폐의 대상이요, 우리 진영을 위한 희생물로 취급했다. 그런 정치 행태는 현대의 문명사회에 관해 배우지 못한 미성숙과 야만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성장, 일자리 참사, 양극화 심화 등 온갖 어려움은 개인·기업의 자유를 짓밟았던 반지성주의적 정치의 결과라는 게 윤 대통령의 정확한 진단이다. 그런 어려움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건 자유라는 처방도 정확하다. 그런 진단과 처방은 전후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을 불러온 에르하르트 총리의 자유 정책과 일치한다. 그는 20세기 독일이 겪은 빈곤 대량실업의 문제는 자유가 없어서 야기됐다고 믿었다. 그의 정책은 그래서 가격·투자·무역 등의 자유화였다.
자유로움 속에서 개인·기업이 혁신적 활동을 하면 빈곤, 저성장, 실업, 양극화의 문제를 시장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자유론이 전제한 시장관이다. 그의 믿음엔 시장은 애덤 스미스 이후 잘 알려진 자생적 질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좌파는 시장은 없는 자에겐 억압이고 있는 자에겐 자유라고 공격한다.
시장에 대한 그런 인식이야말로 여론을 호도해 반(反)자본주의 정서를 불러일으킨 미신이다. 그런 미신은 경제민주화,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는 명분의 좌파 정권을 등장시켰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양극화와 사회 갈등이 아닌가!
자유와 시장이 풍요로운 번영을 가져온 오늘날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대한민국의 발전사도 자유와 시장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중국이 그나마 빈곤 퇴치와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도 친(親)시장과 개방 덕택이다. 북유럽의 번영은 복지 확대가 아니라 자유시장과 낮은 세금, 도덕적 품성의 재결합 덕분이다. “자유로운 시장이 숨 쉬고 있던 곳은 언제나 번영과 풍요가 꽃 피었다”는 윤 대통령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좌익들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들어 윤 대통령 자유론의 가치를 깎아내린다. “고삐 풀린 자본과 시장이 초래한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금융위기는 주택시장에 대한 정부의 잘못된 개입과 통화량을 무진장 확장한 정책 때문임에도 좌파는 책임을 자유와 시장에 떠넘긴다. 그런 비판은 자유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이는 시장이 정부보다 현명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간과한 결과다.
요컨대, 윤 대통령의 자유론은 역사 교과서에 명시된 자유를 없애버렸고 헌법에서도 이 단어를 빼는 내용의 개헌을 시도했던 좌익 정부뿐만 아니라 좌익의 프레임에 빈번히 굴복하는 보수 정부의 자유 홀대에 대한 반격이요,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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