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투자 라운드와 기업가치가 같더라도 가능한 한 투자를 더 받아두어야 한다."
풍부한 유동성 덕분에 투자 유치 실적을 경신해온 스타트업들에 빨간불이 켜졌다. 금리 급등으로 자산시장 전반이 경색되면서 벤처투자업계까지 불똥이 번지고 있어서다. 초기 스타트업들은 당장 유치할 수 있는 투자금은 조건 없이 받아놓은 뒤 앞으로 시장이 더욱 얼어붙어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을 길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3일 미국 테크크런치 등 외신에 따르면 글로벌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와이콤비네이터(YC)는 최근 포트폴리오 회사들에 '경기 침체'라는 제목의 서한을 보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YC는 세계 최초·최대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AC)로 꼽힌다. 2005년 설립돼 에어비앤비, 드롭박스 등 글로벌 업체들을 키워냈다. 3000개 이상 포트폴리오 기업들의 총가치는 6000억달러(약 760조원)에 달한다. '실리콘밸리 킹메이커'로도 불린다.
YC는 서한에서 "앞으로 6~12개월 내 자금 조달 계획이 있다면 경기 침체의 절정에서 진행하게 될 것"이라며 "계획을 바꾸라"고 권고했다. 기술 기업들의 주가 폭락 등 '시장 파괴'가 초기 스타트업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계획을 세우라"고 조언한 YC는 "앞으로 24개월 동안 자금 조달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하고, 회사가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현금이 부족한 경우 투자자로부터 지금 당장 유치할 수 있는 돈이 있다면 직전 투자 라운드와 비교해 조건이 같더라도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서비스나 제품을 구체화하지 않은 기업들은 투자 유치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YC는 "시리즈A 투자 유치 이후 시장성 있는 제품을 찾지 못했다면 다음 라운드 진행이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기 침체기엔 대형 벤처캐피털(VC)도 소극적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투자자 미팅 횟수는 총투자 감소에 비례해 줄지 않는데 창업가들은 펀드가 여전히 투자에 적극적이라고 속기 쉽다"고 했다.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서도 투자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경각심이 커지고 있다. YC가 서한에서 강조한 "최근 5년간 투자설명회(IR) 시장이 오히려 비정상적이었다"는 평가가 국내서도 격언처럼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YC는 "회사를 창업한 지 5년 미만 대표들은 정상적인 투자 유치 환경이 무엇일지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경기 침체에 살아남는 기업은 상당한 시장점유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내도 '돈을 골라 받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중 자금이 많았고, 기업가치 양극화가 심해져 소수 기업에 투자금이 과도하게 몰린 상황"이라며 "기업가치 전반의 조정이 찾아와 스타트업 '옥석 가리기'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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