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의 갓선(GODSON·대자).’
영국 작가 필립 콜버트(43·사진)를 부르는 말이다. 그의 작품엔 ‘랍스터’가 주로 등장한다. 랍스터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자 예술적 상징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랍스터 작가’라고도 불린다.
콜버트의 예술 장르는 ‘메가 팝아트’로 정의된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마르셀 뒤샹 등 팝아트와 컨템퍼러리 아트 거장의 이미지를 적극 차용하는 동시에 18세기와 19세기 거장들의 명화 이미지도 함께 녹여낸다. 그렇게 탄생한 게 그의 ‘랍스터 월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 개인전 ‘드림 오브 더 랍스타 프래닛’으로 한국을 찾는 콜버트를 지난 25일 서울 성수동 더 페이지갤러리에서 만났다.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30여 점의 신작을 포함한 60여 점을 런던 스튜디오에서 가져왔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밝고 화려한 색이 어우러진다. 멀리서 보면 만화나 동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가까이서 보면 다르다. 랍스터는 동그란 두 눈을 공허하게 뜨고 있다. 전쟁 영웅이 돼 적을 무찌르기도 하고, 성난 파도 속에서 겁에 질린 모습으로 우리를 응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공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고도의 기술 발전으로 지옥과 천국이 교차하는 세상, 그에 대한 사유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헌트 시리즈’에는 콜버트의 방대한 미술사적 지식과 풍성한 이미지가 교차한다.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 그의 제자 안토니 반 다이크, 초현실주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 등 고전 화가의 명화 속에서 영웅 대서사시를 뽑아낸다. 여기에 동시대의 대중문화, 인터넷 문화, 과잉 소비문화를 덧입혔다.
또 다른 연작인 ‘컬래버레이션 페인팅’은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가 공동 작업한 작품들을 오마주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현대미술가들의 유명 작품을 ‘하이퍼 디지털 팝아트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유머와 아이러니가 반복되는 그의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철학적 질문을 하게 한다.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이미지인데, 번쩍이는 색감이 낯설면서도 따뜻하다.
“나의 랍스터에는 입이 없어요. 어릴 때 찰리 채플린 영화를 보며 언어가 없이도 모든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동시대의 본질을 보여주는 게 예술의 역할이라면,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진지함에 빠지지 않으면서 진실을 보게 하고 싶었어요.”
스코틀랜드 태생인 그는 왜 랍스터를 또 다른 자아의 캐릭터로 선택했을까. 그에게 랍스터는 신비한 생명이자 외계인 같은 존재다. 어릴 때 집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에서 게와 랍스터 등을 보면 바닷속이 하나의 또 다른 우주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명화 속에서 인생의 덧없음, 불로장생과 무병장수의 의미 등으로 쓰인 랍스터를 보며 자신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랍스터가 될 때, 나는 예술가가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뒤늦게 아티스트의 길에 들어섰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고민했다. ‘몸이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정신과 영혼을 창조했다’는 철학을 구현하듯 그는 온몸으로 랍스터 세계를 구축한다.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는 동시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가 창조한 랍스터 캐릭터를 입고 신고 다닌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도 랍스터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랍스터 종 보존을 위해 1만 마리 랍스터 양식 펀딩에 나서 자연 방생 프로젝트를 하는가 하면, 런던대 랍스터 로봇 프로젝트를 협업하기도 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랍스터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대중문화와 소비문화, 인터넷 문화와 고전 작품이 혼합된 그의 작품을 두고 삼성전자, 벤틀리, 코카콜라, 나이키, 애플, 몽블랑 등 글로벌 브랜드의 협업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틱톡과 협업했을 때, 많은 사람이 제 작품을 해시태그로 올리며 ‘랍스터 열풍’에 합류하는 것을 보고 짜릿했습니다.”
그의 작업 방식엔 경계가 없다. 3D(3차원) 소프트웨어로 작업할 작품을 먼저 구상한 뒤 아이패드로 스케치 등 밑그림을 그린다.
재생 플라스틱 등을 활용한 조형 작품은 전시장에 거대한 리듬을 더하는 요소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랍스터, 생각하는 랍스터, 캠벨 수프 캔을 뒤집어쓴 랍스터 등 2m가 넘는 조형물들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는 “뼈대는 알루미늄으로 제작했지만 플라스틱을 덧입혀 현대 소비문화의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과잉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과연 기술은 우리를 구하는가, 우리를 망치는가 질문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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