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범이 뒤흔든 '술판'…양조장 창업 뛰어드는 MZ세대

입력 2022-05-27 08:47   수정 2022-05-27 10:49


그야말로 ‘양조장 전성시대’다. 전국 각지에 전통주 양조장과 맥주 브루어리 등 중소 주류 제조 사업장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술 제조법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은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주당들의 선호가 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되는 라거 맥주와 희석식 소주에서 수제 맥주, 전통 소주 등으로 급격히 다변화한 데 따른 결과다.

27일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발급된 주류 제조 면허는 총 2717개로, 2020년 말 2571개보다 146개(5.7%) 증가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 2443개와 비교하면 2년간 274개(11.2%) 늘어난 것이다.


주종별로는 막걸리 등 탁주와 증류식 소주, 맥주, 약주에 대한 신규 면허가 많았다. 김범구 국세청 법인납세국 소비세과장은 “주류면허지원센터의 양조 교육 프로그램이 접수 시작 1분 안에 매진될 정도로 최근 양조사업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며 “젊은 층에서 주류 제조 창업에 도전하는 사례도 부쩍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변화는 주류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가 기폭제로 작용했다. 주류 위탁제조생산(OEM)이 지난해부터 허용돼 대규모 시설투자 없이도 창업이 가능해졌다. 앞서 2020년에 맥주와 막걸리에 대한 세금 부과방식이 종량세로 개편되고, 2017년에 전통주의 온라인 판매가 허용된 것도 영향이 컸다.

코로나19 사태도 중소형 양조장엔 호재였다. 룸살롱 등 유흥시장이 죽고 ‘혼술’·‘홈술’ 문화가 확산하면서 다양한 주종의 맛과 향을 찾는 소비자들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수 박재범 씨가 만든 ‘원소주’, 크래프트맥주 열풍을 일으킨 ‘제주맥주’ 같은 ‘혁신 제품’들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오랜 기간 획일적이었던 술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오픈런' 부른 전통주
'셀럽(유명인)에 기댄 반짝 인기인가, 게임 체인저의 등장인가.'

'원소주'가 완판행진을 벌이며 돌풍을 일으키자, 메이저 주류업계도 술렁이고 있다. 단순히 연예인 마케팅 제품으로 여기기엔 원소주의 파장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명욱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는 "원소주는 '전통주가 돈이 된다, 트랜디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준 혁신 사례"라고 촌평했다.

원소주는 지난 3월 말 출시 이후 누적 13만병 이상이 판매됐다. ‘품질 유지’를 명목으로 하루 판매량을 500세트로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일궈낸 성과다.

지난 달 여의도 더현대서울에 팝업스토어를 열었을 때는 1000명 이상이 대기하며 오픈런이 벌어져 화제를 모았다. 출시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홈페이지에서는 하루 판매물량이 수 초 내에 매진될 정도다.


박 씨는 CJ ENM 프로듀서 출신의 김형섭 컬처앤커머스 대표와 손을 잡고 농업회사법인 원스피리츠를 세워 원소주를 만들었다. 강원도 원주쌀을 사용해 감압증류 방식으로 술을 뽑아낸 후 옹기에 숙성한 증류식 소주다. 원소주의 한 병 가격은 1만4900원. 소주 점유율 1위 인 참이슬의 편의점 판매가격 1950원보다 7배 이상 비싸다.

전문가들은 원소주가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소비욕구를 자극하는 여러가지 요소를 갖췄다는 점에서 단순히 ‘반짝 셀럽 효과’로 볼 수 만은 없다고 진단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차별화한 디자인과 제조방식, 팬덤 비즈니스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박 씨의 스토리, 팝업 스토어로 시작해 희소성을 부각한 마케팅 등이 전략적으로 결합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소품종 대량생산 시대 저무나
메이저 주류업계가 원소주의 성공을 주목하는 것은 앞으로도 이런 사례가 잇따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지금의 소품종 대량생산 구도가 크게 흔들릴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원소주와 더불어 1년 전 편의점 채널에서 지각변동을 불러일으킨 ‘곰표 밀맥주’도 이런 전망에 힘을 싣는 사례다. 지난해 5월 편의점 CU에서 판매한 곰표 밀맥주는 카스, 테라 등을 단숨에 제끼고 맥주 매출 1위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켰다.

코로나19 확산 속에서 재미와 색다른 맛을 갈구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킨 게 가장 큰 성공요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주위트에일’‘제주펠롱에일’ 등 연달아 히트작을 낸 제주맥주는 무섭게 덩치를 키우면서 지난해 코스닥 상장에도 성공했다.

연 9조원 규모의 국내 주류시장의 약 80%를 희석식 소주와 라거 맥주가 차지하는 게 실상이다. 오비맥주 ‘카스’가 10년째 가정용 맥주 1위를 지켜왔고, 하이트진로의 ‘참이슬’과 롯데칠성음료의 ‘처음처럼’이 장기간 소주시장을 지켰다.

하지만 2년 넘게 이어진 코로나19는 술시장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업소용과 가정용 비중이 절반씩이었던 이 시장은 코로나19 기간에 가정용 소비 비중이 70%까지 높아졌다.

‘홈술’, ‘혼술’ 문화의 확산으로 개개인의 다양한 취향을 저격한 술들이 인기를 끈 것이다. 크래프트 맥주 판매는 2020년 1180억원에서 지난해 20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윈저’, ‘임페리얼’ 같은 천편일률적인 블렌디드 위스키 대신 개성이 강한 싱글몰트 위스키 수요가 증가한 것도 이 같은 변화의 일환이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간 27.5% 급증한 주류제조면허는 주류시장의 다변화를 뒷받침할 발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급변하는 주류 생태계
이미 술시장에는 올 여름을 뜨겁게 달굴 다양한 신제품들의 추가 등판이 예고돼 있다. 편의점 GS25는 원스피리츠와 손잡고 오는 7월 원소주의 후속인 ‘원소주 스피릿’을 판매할 예정이다.

세븐일레븐도 이에 맞서 뉴욕 한인타운에서 먼저 인기를 끈 한국식 전통주 ‘토끼소주’를 선보이고, 7월에는 가수 임창정 씨의 히트곡 ‘소주한잔’에서 이름을 딴 전통소주를 출시할 계획이다.

한 주류업계 고위 관계자는 “엔데믹으로 유흥시장이 회복된다해도 메이저 주류회사들이 신생 브랜드의 성공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이를 의식해 기존 제품의 마케팅을 강화하면서도 포트폴리오 다양화를 추진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그는 “편의점, 대형마트 등 유통업체들도 경쟁력있는 양조 파트너를 찾는 데 혈안이어서 주류시장의 경쟁은 한층 치열해 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수정/한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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