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벙커야, 그린이야"…가뭄에 사라진 골프장 잔디

입력 2022-05-29 17:19   수정 2022-06-07 15:31


29일 경기 광주의 한 골프장을 찾은 김정현 씨(33)는 라운드 내내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페어웨이 곳곳이 잔디도 없이 흙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린 주변 역시 잔디보다 모래가 더 많을 정도였다. 김씨는 “레드티는 따로 티박스도 없어 페어웨이 중간에서 쳐야 했다”며 “그린피를 28만5000원이나 내고 어렵게 예약한 곳인데 이런 잔디 컨디션은 너무한 것 같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올 시즌 전국 골프장에 ‘잔디 비상’이 걸렸다. 지난겨울부터 이어진 심각한 가뭄에 잔디 수급난으로 가격도 크게 뛰면서 잔디 상태가 엉망인 골프장이 속출하고 있다.
최악의 가뭄, 무리한 동절기 영업 겹쳐
불량 잔디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은 지난겨울부터 이어지고 있는 가뭄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겨울 전국 강수량은 13.3㎜였다. 이전 30년 평균 강수량인 89.0㎜의 15% 선에 그치는 수준으로, 1973년 기상 관측 이후 가장 낮은 기록이다. 지난 6개월간 강수량도 평년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여기에 코로나19 특수에 올라탄 일부 골프장의 과도한 영업이 사태를 더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통상 골프장은 혹한기에는 영업을 줄이거나 골프장 운영을 중단한다. 잔디가 지면 위로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땅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시기다.

하지만 지난해 골프붐에 이례적으로 온난한 기온까지 더해지면서 적잖은 골프장이 동절기에도 3부 영업까지 돌렸다. 한 골프장 코스 관리자는 “지면 밖으로 잔디가 보이지 않더라도 라운드가 이어지면 땅속의 잔디가 혹사당하기 때문에 2부 영업을 할 때와 3부 영업을 할 때는 잔디 관리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며 “하지만 아직 잔디 관리 노하우가 쌓이지 않은 영업장에서 적절한 관리 없이 3부 영업을 하면서 잔디가 다 죽어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상 골프장 잔디에 문제가 생기면 뗏장으로 잔디를 보식해 코스를 정상화한다. 하지만 가뭄으로 잔디농장도 직격탄을 맞으며 품질 좋은 잔디 가격이 크게 치솟았다. 한 수도권 명문 골프장 관계자는 “켄터키그라스, 벤트그라스 가격이 작년보다 두 배 이상 뛰었고 종자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전했다. 켄터키그라스, 벤트그라스를 주로 쓰는 그린과 티잉구역 관리가 더욱 어려워진 이유다. 주말 골퍼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몇몇 악명 높은 골프장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퍼팅라이를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티박스가 아니라 벙커에서 티샷하는 기분”이라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수급난 계속…정상화 시간 걸릴 듯”
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폭등과 물류난으로 전체적인 코스 관리 비용도 천정부지로 치솟은 상태다. 골프업계 관계자는 “잔디 관리 노하우가 쌓인 골프장은 자체적으로 잔디를 키워 이번 가뭄과 수급난에 타격이 작은 편”이라며 “이 같은 대비 없이 겨울 동안 영업을 돌린 골프장들은 아직까지 딱히 상황이 좋아질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잔디 정상화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골프업계에서는 최근 조금씩 방역 기준이 낮아지면서 해외 골프 여행이 재개되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불량 잔디 사태로 쌓인 골퍼들의 불만이 해외 골프 여행 수요를 터뜨리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수도권 골프장 대표는 “아직까지는 코로나19로 인한 부킹난이 지속되고 있어 그린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골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지만 올 하반기만 돼도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며 “내년부터는 코스 품질을 지키지 못하는 골프장은 올해 같은 배짱 영업을 이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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