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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인턴’에선 한 스타트업의 30대 여성 최고경영자(CEO) 밑에서 일하는 70세 할아버지 인턴 얘기가 나온다. 국내에도 영화 속 주인공과 비슷한 인물이 있다. 대형 은행에서 20여년간 일하다 퇴직한 후 지난 3월부터 온라인투자연계금융(P2P 금융) 업체 어니스트펀드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이주성씨(52·사진) 얘기다.
1970년생인 이씨는 한양대 회계학과를 졸업한 후 신한은행에 입행해 약 20년을 근무했다. 일선 영업점에서 약 13년간 중소기업 금융 영업 업무 등을 담당했으며 7년 정도는 본점에서 인적자원개발(HRD) 관련 일을 했다. 2018년 차장 직급으로 명예퇴직을 하며 20년 동안의 뱅커 생활을 마쳤다.
이씨의 주변에는 본업을 그만둔 뒤 퇴직금을 바탕으로 개인사업을 하거나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강연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씨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빅데이터를 공부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씨는 “HRD 부서에서 교육 기획 업무를 했을 때 직원들의 교육 이력 등을 데이터화시켜서 맞춤형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싶었는데, 지식이나 인프라가 부족해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며 “그때부터 데이터를 잘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이씨는 고려사이버대 빅데이터학과에 편입했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것을 익히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이씨는 “용어도 어려웠고 컴퓨터 로직이 제 사고로는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았다”며 “다른 수강생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계속 공부를 하다보니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약 3년간의 공부 끝에 지난 2월 학위를 땄다.
“학교에서 배운 걸 실무에서 써먹어보고 싶었어요.” 이씨의 이런 바람과 달리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이씨는 “돈을 내고서라도 실습을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며 “아무래도 기업들은 초보보다 바로 실무에 써먹을 수 있는 사람들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업 입장에선 50대인 그의 나이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란 설명이다.
하지만 어니스트펀드에서 기회가 왔다. 비록 인턴이라는 직위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응했다. 남들처럼 똑같이 자기소개서도 제출하고 면접도 거쳐 당당히 합격했다. 지난 3월부터 어니스트펀드 인공지능(AI) 랩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동료 인턴의 나이는 20대다. 이씨는 “어니스트펀드가 핀테크 기업이고 제가 은행 경험이 많다보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 같아 합격한 것 같다”고 했다.
이씨는 현재 데이터 모델링 업무를 맡고 있다. 아직까진 잘 모르는게 많다. 이씨는 “머릿속에 퍼즐처럼 쪼개져 있는 지식들을 잘 연결시키는 게 어려운 거 같다”며 “제가 교수님이라고 표현하는 랩장님(신윤제 CDO)이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직급 대신 영어이름을 부르는 사내 문화 때문인지 다른 동료들과도 나이와 상관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씨에게 목표를 물어봤다. 먼저 소박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씨는 “배우는 일도 재밌고 회사 분위기도 좋다”며 “정식 직원으로 전환이 돼서 어니스트펀드의 일원으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며 인생 2막을 보내고 있는 이씨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강연이나 멘토링 활동도 하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빅데이터를 배워두면 업무 효율성을 크게 개선된다는 점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엑셀이 뭔지 모르던 분이 엑셀 교육을 듣고 난 후 업무 효율이 크게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이어 “파이썬 같은 것은 난이도가 어렵지 않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며 “IT와 전혀 상관 없는 제가 50대 늦은 나이에 뛰어든 것처럼 빅데이터가 그렇게 진입장벽이 높지 않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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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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