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일정에 이번 투어가 잡혀있었다면 지난주에 이미 빈에서 같이 연습하고 연주했을 거예요. 근데 그게 아니기 때문에 투어에 원래 없던 연습 일정이 잡혔어요. 토요일 오후에 두 시간 반, 휴식 15분 빼면 두 시간 15분이죠. 그리고 일요일 공연 전에 무대 리허설이 세 시간 있고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어떤 전기가 튈지 음악가로서 너무 궁금해요.”
지난 27일 JW 메리어트 서울 호텔 9층 비즈니스 회의실에서 만난 지휘자 장한나는 정말 궁금하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장한나는 이틀 전 뉴욕에 있을 때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측으로부터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필리프 조르당 대신 내한공연을 지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인천행 비행기를 잡아타고 전날 밤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28일 자 한국경제신문 지면(25면) 인터뷰 기사에도 썼듯이 장한나는 “빈 심포니에는 빈 특유의 소리가 있을 텐데 제가 추구하는 베토벤과 융합하면 어떤 소리가 나올지 너무나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저도 너무나 궁금해졌습니다. 약 다섯 시간의 리허설 동안 장한나와 빈 심포니 사이에 어떤 ‘전기’가 튀어 어떤 따끈따끈한 베토벤이 만들어졌을지가 말이죠. 그래서 지난 29일 이번 내한공연의 첫 공연 현장인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을 찾았습니다.
공연 시작 10분 전쯤 콘서트홀에 들어갔을 때 무대에는 이미 악장을 포함한 모든 빈 심포니 연주자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음악회에서는 공연 시간에 맞춰 악장이 입장해 청중에게 인사하는 게 보통인데 이를 생략하고 바로 조율에 들어갔습니다. 곧이어 협연자인 바이올리니스트 길 사함과 지휘자 장한나가 함께 등장했습니다. 장한나는 긴 머리를 뒤로 묶고 검은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습니다.
첫 연주곡은 요하네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번호 77입니다. 이 작품을 설명할 때는 보통 작곡가의 절친이자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제프 요아힘을 언급합니다. 장한나는 27일 인터뷰에서 1일 서울 공연에서 연주하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연관 지어 이야기했습니다. 지면에 담지 못한 장한나의 곡해설(?)을 소개합니다.
“베토벤은 당시 솔리스트의 기량, 화려한 테크닉이 돋보이는 일반적인 협주곡이 아니라 교향곡 같은 협주곡을 썼어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어우러짐이 조화롭고, 균형이 잘 잡힌 훌륭한 곡이죠. 같은 조인 D장조로 브람스도 협주곡을 썼어요. 교향곡 1번을 쓸 때 그랬던 것처럼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할 때도 베토벤에게 사로잡혀 있었죠. 오케스트라가 주였다가 솔리스트가 주였다가 하면서 긴밀하게 짜여 있죠. 딱딱 나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밀도 높게 어우러져요. 두 곡의 공통점은 음악적 완성도가 교향곡 같은 최고의 협주곡이라는 거죠.”
따라서 “두 협주곡을 연주할 때는 비르투오소라는 수식어보다는 음악가, 뮤지션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솔리스트가 필요하다”며 길 샤함을 언급했습니다. “길 샤함,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가’예요. 두 협주곡에 가장 적합한 솔리스트입니다. 솔리스트는 테크닉은 기본이고요. 기량 과시보다는 음악을 중시하는, 음악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부터 생각하는 음악가가 이 협주곡에 필요한데요. 길 사함이 딱 그런 음악가입니다. 길 샤함과 협연하는 것도 처음인데 이번에 제가 (대타 지휘로) 올 이유가 정말 많았네요. 베토벤과 브람스의 도시인 빈에서 어떤 브람스 소리를 가져올지도 정말 궁금해요.”
드디어 연주가 시작됐습니다. 1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 약 2분 30초간 흐르는 관현악 도입부부터 장한나는 압도적인 파워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나갑니다. 오케스트라가 총주로 강렬한 사운드를 내는 대목에선 마치 춤추는 듯했습니다. 지휘자의 모습을 잠깐 신기한 듯 바라보던 길 샤함은 진지한 태도로 독주 파트 주제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본격적인 어우러짐이 시작됐습니다. 길 샤함은 자유롭고 과감하게 위치를 바꾸며 연주했는데요. 지휘자의 옆이 아니라 지휘자와 거의 얼굴을 맞대는 자리까지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장한나의 파워풀한 지휘에 못지않게 길 샤함도 거장다운 힘과 여유로움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습니다. 지휘자와 솔리스트는 끊임없이 서로 쳐다보며 얼굴과 동작으로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초반 약간의 어색함은 뒤로 하고 지휘자와 솔리스트, 오케스트라가 하나로 동화된 듯한 무대가 펼쳐졌습니다.
1악장이 끝나고 장한나와 길 샤함은 활짝 웃으며 뭔가 대화를 나누더니 잠시의 조율을 거친 후 2악장에 들어갑니다. 아다지오 악장. 길게 이어지는 오보에 솔로와 관악 합주는 ‘이게 빈 사운드인가’ 싶은 감탄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오묘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바이올린 독주의 아리아가 객석을 숨 멎게 합니다. 장한나는 독주와 관현악을 조화롭고 매끄럽게 연결합니다. 그야말로 밀도 높은 어우러짐이었습니다.
악장 간 쉼 없이 3악장 ‘알레그로 지오코소, 마 논 트로포 비바체’가 이어집니다. 여기서 지오코소(giocoso)는 ‘익살스럽게’란 뜻입니다. 길 샤함과 장한나의 3악장은 제가 이제껏 봤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실연 중 가장 익살스러운 연주였습니다. 3악장은 불규칙한 론도 형식으로 원래 경쾌하고 유머러스합니다만, 이 3악장이 이렇게 즐겁고 신나고 재미있을 수가 있다는 것을 이번 연주를 통해 알았습니다. 길 샤함과 장한나는 서로 미소를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정말 흥겹고 유쾌한 소리를 만들어냈습니다. 3악장 내내 이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연주하는 솔리스트와 지휘자는 처음 봅니다. 그들의 흐뭇한 대화가 객석에 고스란히 전달됐습니다.
기립박수가 길게 이어졌습니다. 길 샤함은 앙코르로 미국 작곡가 스콧 휠러(Scott Wheeler)가 길 사함을 위해 작곡한 바이올린 솔로곡 ‘Isolation Rag’와 바흐의 ‘가보트와 론도’(Gavotte en Rondeau from Partita BWV 1006)를 들려줬습니다. 자유로운 템포의 느긋함과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인터미션 후 2부. 연주곡은 장한나가 ‘15년 지기 친구’라고 했던 베토벤 교향곡 7번 A장조입니다. 장한나가 2007년 지휘자로 데뷔한 성남아트센터 무대에서 연주한 교향곡이 7번입니다. 이번에도 지면에 못 실었던 장한나의 ‘7번 이야기’부터 소개합니다. “7번이 제게는 가장 베토벤다운, 심지어 베토벤 본인을 능가하는 에너지가 음악의 옷을 입은 교향곡입니다. 이번에 뉴욕에서 올 때 비행시간만 15시간 걸렸는데요. 비행기 안에서 베토벤 7번 악보를 계속 보면서 왔어요. 결론은 ‘와 어떻게 이런 음악을 썼나’라는 거에요. 베토벤이 놔주지 않았어요. 끝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너무나도 힘있게, 넋 놓고 들을 수밖에 없게 전달하니까요.”
장한나가 다시 등장합니다. 자신감 있는 당당한 모습입니다. 1악장 포코 소스테누토 - 비바체. 62마디의 장대한 서주부터 힘 있고 역동적인 동작으로 오케스트라를 리드합니다. 장한나는 어릴 적 첼리스트 시절부터 온몸으로 음악을 표출하는 스타일입니다. 지휘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보를 읽으며 작곡가가, 음표가 전달했던 메시지를 표정은 물론 온몸으로 표현합니다.
리스트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을 ‘리듬의 신격화’, 바그너는 ‘무도의 총화’라고 했습니다. 1악장부터 춤곡풍의 리드미컬한 음악이 다양하게 변주되며 펼쳐집니다. 장한나는 서주부터 서서히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춤을 추는 듯이 음악의 리듬을 온몸에 실어 지휘합니다. 몸을 앞으로 구부리거나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뒤로 젖히기도 합니다. 동작이 상당히 커서 공격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음악에 담긴 리듬을 적확하게 전달하고 지시합니다. 베토벤은 1813년 빈 대학 강당에서 온몸으로 음악을 표현하는 지휘로 교향곡 7번을 초연했다고 합니다. 지나친 상상일 수도 있지만 장한나의 지휘를 보면서 초연 때 베토벤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악장. 슬프면서도 웅장한 장송곡 풍의 음악입니다. 7번에는 으레 교향곡에 들어 있기 마련인 느린 악장이 없습니다. 2악장을 느린 악장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템포는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입니다. 장한나는 다이내믹(셈여림)을 온몸으로 살리면서 리듬감 있게 곡을 연주했습니다. 박력이 넘치는 스케르초 3악장에선 장한나 역시 박력이 넘칩니다. 베버가 “드디어 베토벤이 미쳤다”고 했다는 4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에서 장한나와 빈 심포니는 폭풍같이 질주합니다. 휘몰아치는 리듬과 폭발력 넘치는 사운드를 일사불란하게 들려줍니다.
빈 심포니는 장한나의 과격한(?) 제스처에 한 치의 오차 없이 반응하면서 빈 정통의 사운드를 유감없이 뿜어냈습니다. 리허설 약 5시간 만에 이렇게 하나 된 소리를 들려주다니 장한나도 빈 심포니도 대단합니다. 날 것의 파닥파닥한 신선함과 싱싱함도 느껴졌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박수와 환호 속에 앙코르를 세 곡이나 들려줬습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과 이지수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아리랑’, 슈트라우스 형제의 ‘피치카토 폴카’입니다. 아리랑에선 호른의 멜로디 솔로 연주가 참 좋았습니다. 폭풍 같은 질주를 마친 탓인지 마지막 피치카토 폴카 연주는 살짝 힘겨워 보였습니다.
장한나와 빈 심포니의 내한 공연은 31일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오후 7시)에 이어 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오후 5시)로 이어집니다. 1일 공연에선 브람스가 아니라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길 사함과 협연합니다. 장한나는 “연주는 대화의 연장선”이라며 “반복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장한나와 빈 심포니가 실제 공연에서 두 번의 긴 대화를 나눈 베토벤 교향곡 7번이 세 번째 반복 공연에선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집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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