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일단 목돈을 맡기면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한 푼의 임차료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전세는 산업화·도시화 속에선 주택 구입자금을 융통하는 중요한 사금융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집주인은 은행 대출보다 싸게 돈을 융통할 수 있었고, 세입자는 매달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니 자연히 저축이 늘었다.
전세가 주택 임대의 대세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가구소득 증가와 함께 아파트 형태의 공동주택이 급속히 확산하면서다. 낡은 주택과 좁은 골목길을 떠나 아파트로 가겠다는 수요가 폭증하면서 전세 공급도 덩달아 늘었다. 요즘 말로 ‘갭투자’는 투기꾼이나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당장 아파트를 살 현금이 부족한 사람들의 내 집 마련 방편이기도 했다.
이런 한국의 전세 제도가 마침내 월세에 따라잡혔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4월 전국에서 거래된 임대주택 가운데 월세 비중이 50.4%(13만295건)를 차지했다. 월세 거래가 전세를 추월한 것은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1년 이후 처음이다.
1차적 원인은 2020년 7월부터 시행된 임대차 3법 영향이다. 그동안 신고가 잘 이뤄지지 않던 오피스텔, 원룸 등 준주택의 월세 계약 신고가 급증했다. 또 계약갱신청구권 1회 보장(인상률 5% 제한)으로 전세 물건이 줄고, 전셋값이 급등한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은행 대출 창구 문턱이 높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월세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늘어났다.
월세는 대부분 세입자에게 부담스럽다. 특히 금리상승기에 전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뛰어오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전세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임대차 3법까지 가세했으니 이제 월세 비중이 줄어들기는 틀린 것 같다. 대도시 월세가 지금보다 더 비싸지면 청년들의 진학과 취업에도 일정 영향이 있을 것이다. 과거 자취방과 하숙집들이 모두 큰 액수의 보증금과 월세를 요구하는 원룸이나 오피스텔로 바뀐 마당에 어떡하나 싶다.
장규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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