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이들 단체는 라틴어로 ‘fraternitas’ ‘consortium’ ‘societas’ ‘unio’ 같은 단어로 불렸고, 훗날 독일어로 된 사료에 따르면 북부독일에선 ‘Gilde’ ‘Amt’ 등이 주로 쓰였다고 한다. 동부독일에선 ‘Zeche’ ‘Einung’ ‘Innung’ 같은 용어로 불렸고, 16세기 이후엔 독일어권 지역에서 ‘Zunft’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이들은 도시를 장악한 귀족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쳐 무장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면세특권을 철폐하고자 조직적 활동도 했다. 무장 조합들은 성인 또는 구역의 이름을 따거나 별, 선원, 말, 사자, 용 등의 문양을 내세웠다. 피렌체에서 공무원들은 ‘인민과 길드의 수호자’ 이름으로 각종 법령을 발표했다. 1293년 파두아에서 무역길드들은 “파두아시를 모든 폭군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평화상태의 코뮌으로 유지하고 보전하기 위해 단일 기구, 협회, 형제단, 연맹을 구성한다”는 합의를 이루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시에나에서 길드의 높은 정치 참여 활동을 두고 “식료품을 팔고 무두질하거나, 신발을 만들던 사람들이 도시를 통치하는 것은 ‘똥통정부’와 다름없다”는 외부인의 비판이 튀어나왔을 정도다.
플랑드르 지역에서도 길드는 융성했다. 길드는 과세로부터 보호를 요구했고 정치에도 참여하려고 했다. 리에주 같은 곳에선 1303년부터 시의회 의석 절반을 길드가 차지했다. 1520년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일기에서 앤트워프를 지나는 성모승천 대축일 행렬에 대해 ‘온 도시 사람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신분과 길드를 알리는 표식이 있었다. 금세공업자, 도장공, 석공, 테두리장식공, 조각공, 가구장이, 목수, 선원, 어부, 고기장수, 무두장이, 옷장수, 빵장수, 재단사, 신발장사 등’이라고 묘사하며 당시 다양한 모습으로 번창했던 길드의 모습을 전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선 특히 동업조합 외부로부터 경쟁을 배제하는 게 중요했다. 결국 최저가격을 유지하는 등 길드 회원부터 각종 경쟁에서 제한을 받았다. 어떤 장인(마이스터)도 그가 계승해온 이외의 노동을 해선 안 됐다.
한 장인이 다른 장인 밑에서 피고용인처럼 일해서도 안 됐다. 이를 두고 막스 베버는 “중세의 길드 목록은 200종 이상이 기록돼 있는데, 기술적 견지에서 보면 20~30종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라고 촌평했다.
2. 유럽에서 길드가 융성한 이유는 뭘까.
3. 길드의 세력이 커지면서 어떤 현상이 발생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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