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폴골프의 상황은 더 안 좋다. 지난해 판매액 기준으로 15~16위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 매출은 약 400억원을 조금 웃돈다. 캘러웨이(1523억원), 타이틀리스트(1270억원), 파리게이츠(1257억원) 등 ‘빅3’에 비해 4분의 1 규모다. 골프웨어 업계 관계자는 “올 1분기에도 전체 순위가 20위권에 머물고 있다”며 “빈폴과 컨셉트가 비슷한 LF의 헤지스골프는 30위권”이라고 말했다.
빈폴은 지난 2019년 브랜드 런칭 3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당시 삼성물산은 “이름만 빼고 다 바꿨다”고 말할 정도로 변화에 방점을 찍었다. 1960~1970년대 감성을 재해석한 ‘한국적 클래식’을 새로운 브랜드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우리 문화와 역사를 담은 캐주얼 브랜드로 변신한다는 게 골자였다.
현재 한섬으로 옮긴 박철규 삼성패션부문장(부사장)은 변화의 변(辯)을 이렇게 읊었다. “대한민국 시장에서 하나의 브랜드가 30년 넘게 지속해서 사랑을 받고 30년 이상을 생존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사람이 그렇듯 브랜드도 태어나서 성장, 발전하고 성숙 단계를 지나서 쇠약해져 가는데 현재 국내 캐주얼 1위 자리에 있더라도 방심하지 않고 앞으로의 또 다른 30년, 나아가 100년 넘게 영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새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박 전 부사장의 ‘기염’은 공염불이 돼 버렸다.
패션 전문가들은 펜데믹이 가져온 소비 변화를 핵심 요인으로 꼽는다. 길어진 ‘집콕’으로 인해 옷에 대한 수요가 줄면서 소비자들이 이왕 살 거면 에르메스 등 하이엔드급 명품을 사거나 남들은 안 입는 희소성이 있는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에 지갑을 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변화는 백화점의 MD 구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백화점 업계 관계자는 “백화점 입장에서 초고가 명품 브랜드들은 수수료는 최저지만 단위 면적당 판매액이 최고여서 입점을 지속해서 늘릴 수밖에 없다”며 “명품 쪽에서 대략 ‘똔똔(손익분기점)’을 맞추고 모객용으로 활용하되 수익은 다른 패션에서 내야 하는데 1020세대를 겨냥한 토종 스트리트 패션과 신진 해외 브랜드가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백화점 관계자는 “롯데 신세계 현대 모두 삼성물산, LF, 한섬, 코오롱FnC 등 대형 패션기업들에 새로운 브랜드를 발굴, 공급해달라고 주문하고 있다”며 “빈폴이 여전히 백화점 주요 매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삼성물산이 아미 등 막강한 해외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빈폴골프만 해도 ‘빈폴’이라는 30년 넘게 변하지 않는 이미지에 갇혀 있다 보니 자유롭게 변신하는 데 실패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타이틀리스트, PXG, 캘러웨이 등 골프채 전문 브랜드들이 내놓은 전문가형 골프웨어가 인기를 끌었다면 최근엔 지포어, 말본골프 같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건너온 패션형 골프웨어가 백화점 판매량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백화점 단일 매장으로는 국내 최대 매출을 자랑하는 신세계 강남점에서 골프웨어 1, 2위가 지포어와 말본골프”라고 말했다.
또 다른 패션업계 관계자는 “결과론적인 지적이긴 하지만, 3년 전에 삼성물산 패션 부문이 빈폴을 한국적 클래식으로 회귀시키고, 빈폴골프는 전 연령대가 입을 수 있는 무난한 브랜드로 만든 게 실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최근 빈폴골프가 SNS 인플루언서인 젊은 여성 골퍼를 내세워 반전을 꾀하고 있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대기업이 이끌고 주도했던 패션 문화의 종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빈폴만 해도 국내 1위 기업인 삼성이 한국적 캐주얼의 표본으로 만든 브랜드다. 푸른색 계열의 상의에 면바지로 매칭하는 비즈니스 캐주얼도 삼성이 제안한 한국적 패션이다.
코오롱FnC는 엘로드라는 국내 최초의 골프 브랜드를 만들기도 했다. 코오롱 역시 일본, 미국산에 의존하는 골프 문화를 바꾸겠다고 천명했다. 급변의 시대에 빈폴, 헤지스 등 토종 브랜드들이 어떻게 활로를 찾아갈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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