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수련공은 결혼하지 않은 독신자 신분이었기에 고용주인 장인의 집에 기거할 수 있었다.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의 독립된 장인이 되기 전엔 장가갈 수 없고 노총각으로 늙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침식제’라고 불린 이 제도는 업종별, 시대별, 지역별 편차가 있긴 했다. 장인의 집에 기거하지 않고 결혼해 독립된 가정을 꾸리는 수련공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18세기 건축업종에는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수련공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전통은 다른 한편으론 장인이 그의 집에서 먹고 자는 도제와 수련공에 대해 기술교육이나 작업의 영역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지시와 통제를 하는 가부장 지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수공업 기술을 가르치고 기량을 연마하도록 하거나, 고용 기회를 주고 노동의 대가를 임금으로 지급하는 수준을 넘어서 일종의 부모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장인의 일터에서 장인과 수련공의 관계는 임금노동을 축으로 한 소위 ‘계급적 관계’라기보다 연령이나 직업 지식, 경험 등이 큰 역할을 하는 ‘신분집단 사이의 관계’ 성격이 컸다고 역사가들은 분석한다. 두 개의 계급이 아니라 두 세대가 존재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설명이다.
한편에서 침식제를 비롯한 각종 규제는 허가 없이 영업하는 수련공들의 불법 영업행위를 제어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독립된 장인들만의 영업 독점권이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영업활동의 잠재적인 경쟁자인 수련공을 가내에 묶어두고 직접 통제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동업조합의 관습적 규제는 19세기 초까지 유럽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유지됐다. 프랑스에선 대혁명에 의해 수공업 길드 조직이 폐지됐지만 수련공 간 단체적 습성은 그대로 남아 수공업자들은 ‘콩파뇨나주’에 소속됐다.
독일에선 19세기 초까지 프로이센을 제외하곤 상당 기간 길드의 규제가 유지됐고, 결정적으로 폐지된 것은 1860년대였다. 심지어 1838년 목제조선조합이 해체된 함부르크에선 1897년에도 목제조선 장인들이 철제선 제작기술자를 “정통 제작 방식을 위협하는 무허가 수공업자”라고 비난하면서 톱과 망치, 대패 같은 일반적인 목수 연장으로 일하기를 고집했다고 한다. 이들은 수공업자로서 독자적인 작업 리듬을 중시해 조선 기술자들의 감독 아래 있는 것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2. 수련공을 장인의 집에서 숙식하게 한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자.
3. 길드가 유럽 상공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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