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등의 여파로 경제 상황이 악화하면서 산업계에 재고 관리가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특히 패션기업들이 그렇다. 지난 1분기를 기점으로 코로나19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 국면으로 급격하게 전환하는 와중에 인플레까지 겹치면서 미리 생산해 뒀거나, 생산 중인 제품의 판매량을 좀처럼 가늠할 수 없어서다.
늘어나는 재고
15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주요 패션기업의 1분기 재고자산 증가율은 지난해 분기 평균치를 크게 웃돈 것으로 집계됐다. 휠라홀딩스의 재고자산은 작년 1분기 말 5877억원에서 올 1분기 말 8654억원으로 47.2% 증가했다.속옷업체 BYC도 비슷한 흐름이다. 올해 1분기 말 재고자산은 342억원으로 1년 전(309억원)에 비해 10.6% 불어났다. 무신사와 LF도 재고자산이 10% 남짓 늘었다.
이런 증가 속도는 스포츠웨어가 큰 인기를 끌면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던 지난해에 비해 훨씬 빨라진 것이다. 휠라홀딩스는 지난해 분기 평균 재고자산 증가율이 5.7%에 불과했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패션기업들이 생산을 대폭 확대한 골프웨어나 아웃도어 등 스포츠 관련 의류 쪽에서 재고자산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패션업계는 재고가 증가하는 데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의류는 철이 지나면 판매가 어려워 자산 가치가 빠르게 하락한다. 정상 판매가격에 팔리지 않은 의류는 아울렛으로 자리를 옮겨 할인 판매되는데, 이마저도 안 팔리면 ‘땡처리’ 세일에 들어가거나 폐기된다.
‘무재고 실험’ 나선 패션사들
이에 따라 무재고 시스템을 실험하는 패션기업이 속속 나오고 있다. 주문 후 제작 방식을 적용한 두두에프앤엘의 아동복 브랜드 ‘리미떼두두’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2~3개월에 한 번씩 주문을 받아 일괄 제작한 뒤 배송한다. 주문 후 상품을 받기까지 3~4주 정도 시간이 걸린다.캠핑 브랜드 ‘슬로우피크’는 재고 소진 시 별도의 공지 없이 판매를 중단한다. 텐트 재고가 없어 1~2개월 기다리는 건 예삿일이다. 중소 패션 브랜드들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와디즈에서 자금을 수혈해 정해진 수량만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제품 생산에 필요한 자금을 모은 뒤 일정 수량을 생산하고 발송하는 방식이다.
재고 관리 중요성 더 커져
엔데믹으로 생활 패턴이 크게 변화하는 만큼 패션업계에서 재고 관리의 중요성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미국 2위 유통기업 타깃은 1분기 재고자산이 지난해 동기 대비 43% 증가해 주가가 실적발표 당일 25% 하락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이후 폭발하는 수요에 미리 비축해뒀던 홈웨어와 가구 등이 ‘땡처리’ 상품으로 전락해서다. 의류 브랜드 ‘갭’도 지난해 생산해 놓은 레깅스 등 애슬레저 의류를 덤핑 세일하고 있다.
매출 규모가 커 무재고 실험이 어려운 국내 패션 대기업들은 판매량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잡고 재고를 줄이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삼성물산, 한섬, 신세계인터내셔날 등은 의류를 1차로 소량 생산한 뒤 반응을 보고 추가 생산하는 ‘탄력생산’ 방식을 택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정기세일이 시작하는 6월 말께에는 재고 처리가 시급한 이월 상품이 쏟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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