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납품단가 연동제’ 시행을 위한 법안이 발의됐다.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하청업체가 상대적으로 대기업인 원청업체에 납품할 때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연동해 가격을 올려받게 하자는 법이다. 세계 어느 곳에도 유례가 없는 법이어서 더 관심을 끈다. 중소기업계에서는 찬성 입장이 많고, 국회에서도 여야 할 것 없이 입법 논의를 계속 이어왔다. 정부에서는 업계 자율을 침범하는 강제법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의 해외 아웃소싱 확대, 하청기업 쪽에선 단가 맞추기를 위한 혁신노력 기피 등 부작용이 만만찮다. 코로나 쇼크와 글로벌 공급망 훼손에 따른 고물가로 이 제도를 도입하자는 중소기업계 요구는 커지는 분위기다. 사적 자치와 계약자유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에도 시행할 것인가.
시기적으로도 지금이 도입 적기다. 무엇보다 2년 이상이나 지속된 코로나 충격으로 중소사업자 피해가 특히 컸다. 중소상공인들을 위한 국가 차원의 지원이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하다. 많은 논란을 겪지만 중소상공인 대상의 코로나 보상 지원도 그래서 하는 것 아닌가. 현금 지원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법까지 결국 시행하는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와중의 최근 인플레이션도 중소기업엔 치명적 어려움으로 다가온다. 인플레이션이라는 게 무엇인가. 물가 상승, 중소 산업계가 조달하는 원자재의 가격 상승이다. 취약한 중소기업으로서는 치솟는 원자재 가격을 자체적으로 흡수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한 번 정한 계약서로 반년씩, 1년씩 변경 없이 그대로 가기가 어려운 비상 시기다. 오르는 원자재 가격이 적기에 반영돼야 마음 놓고 제품을 만들어 원청기업에 납품을 지속할 수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에 중소 제조업 209개사를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응답 기업 세 곳 가운데 한 곳(67%)이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납품단가에 반영하기 위한 요긴한 방법으로 이 제도 시행을 꼽았다.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납품업체와 대기업이 다수인 원청기업은 ‘갑을 관계’여서 자체적으로 원자재·원료 가격을 적기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가가 나서 법으로 규정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함께 발전하는 상생전략을 펴자는 취지다. 지금껏 나온 법안을 보면 원자재 가격이 10% 이상 오르거나 최저임금이 상승할 때 변동된 금액에 대한 분담을 원청회사와 하도급회사가 약정서에 명문화하자는 정도다.
그렇게 사정이 어렵다고 무리한 법을 만든다면, 극단적으로 말해 대기업의 여유자금을 아예 강제로 빼앗아 중소기업에 넘겨주면 간단히 끝날 일 아닌가. 이익 내는 기업이 법인세 내고 남은 이익금을 전부 환수해 적자 기업에 나눠주면 경영난을 호소하는 기업도, 부도 나는 기업도 다 없어질 일 아닌가. 그런 원리다.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납품단가에 자동적으로 반영토록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우리 민법의 근간인 사적 자치와 계약 자유의 원칙과 배치된다. ‘자유주의의 복원’을 그렇게 외친 윤석열 정부에서 이처럼 반자유주의적 법제화를 용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가격을 거래의 당사자, 즉 시장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직접 개입하면 혁신 기업이 성장할 수 없다. 모든 가격이 마찬가지다. 가격에 굳이 개입하려면 정부가 대주주이거나 정부 업무를 대리하는 공기업의 제품과 서비스에 한해야 한다. 그 또한 막무가내식은 안 된다. 가격 개입이 한국 최대 공기업인 한국전력을 빚투성이 부실기업으로 만들지 않았나. 정부가 적정 이윤을 보장해주겠다면 누가 원가 절감에 나서고, 혁신을 고민하겠나. 이런 경제가 과연 발전할 수 있나. 가뜩이나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게 더딘 나라가 한국인데, 눈앞의 이익관계만 보는 강제법이 이를 가로막을 판이다.
한국경제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원자재 가격이 10% 올랐을 때 납품단가 연동제로 납품 가격에 반영할 경우, 국내 중기에 대한 대기업 수요는 1.45% 감소하고 해외 중기에 대한 수요는 1.21% 증가한다. 정부 일각의 인센티브 방안도 좋아 보인다. 정부의 가격 개입이나 법을 통한 강제가 아니라, ‘표준 하도급계약서’를 만들어 자발적으로 부응하는 기업에 혜택을 주는 것이다. 원가 연동제를 스스로 시행하는 원청기업에 세제 등으로 파격적 지원을 해준다면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강제법’보다 ‘자율적 상생 노력’이 무난하고 길게 갈 수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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