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6월 17일 15:48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남미 경제학자가 쓴 책에 관심을 가질만한 한국 독자가 몇이나 될까. 2003년 에르난도 데소토의 ≪자본의 미스터리≫가 국내 처음 출간됐을 때 서점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제3세계 국가는 왜 가난에 시달리는가’를 진지하게 고찰한 이 책은 5년 뒤 절판돼 쓸쓸히 퇴장했다.
수명이 끝난 책을 10여년만에 소환한 건 수많은 일반 독자들이었다. 제목처럼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중고 책은 출간 당시 정가의 두 배에 거래됐다. 이 책이 역주행한 건 ‘대체불가능토큰(NFT)을 예언한 책’으로 입소문을 탔기 때문이다. 책은 무형자산의 소유권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시스템을 강조한다. 블록체인 기술 발전으로 화두가 된 ‘디지털 재산권’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점을 간파한 독자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자 출판사는 최근 이 책의 표지를 새로 입혀 개정판을 냈다. 출간하자마자 벌써 주요 서점 경제·경영 주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자본의 미스터리≫의 핵심 질문은 ‘왜 제3세계 국가들은 가난에 시달리는가’다. 저자 데소토는 페루 경제학자로,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일했고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의 경제 자문역도 맡았다. 페루는 빈곤 문제의 해법이라며 강제 불임시술까지 자행했다. 헛발질을 하는 페루 정부를 보면서 데소토는 고민을 거듭했다. ‘자본주의는 왜 서구에서만 성공을 거뒀는가.’ 그는 ‘남미병’의 발병 원인부터 찾았다. 그래야 처방전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제3세계 사람에 대해 ‘기업가 정신이나 시장 적응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한다.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못 산다는 것이다. 제3세계 국가가 가난한 이유로 ‘지능지수(IQ)가 낮다’는 이유를 대기도 한다. 그러나 서구와 다른 세계 사이의 ‘부의 불균형’을 문화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 크다.”
‘죽은 자본’. 데소토는 제3세계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을 이렇게 진단한다. 소유권, 재산권 등 자산 등록·운영 시스템이 낙후된 탓에 돈이 헛돌고 있다는 것이다. 데소토가 초판(2000년)을 낼 당시 파악한 페루의 농촌과 도시에 산재한 불법 부동산의 가치는 740억 달러. 이는 1998년 침체기 이전의 리마 증권거래소가 보유한 총자산의 5배에 달하는 수치다. 당시 민영화할 수 있는 페루의 모든 국영기업과 국유시설을 자본으로 환산한 가치의 11배에 이른다.
그는 페루에 더해 아이티, 필리핀, 이집트 등 제3세계와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 합법적인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은 부동산을 모두 합한 총가치는 최소 9조3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에서 유동되는 모든 화폐의 액면가를 합한 것의 약 2배 규모. 책이 쓰여진 2000년 무렵의 수치다.
제3세계 국민들이 악랄해서 자산을 숨기려 든 게 아니다. 데소토는 페루에서 ‘합법적 사업’이 얼마나 힘든지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팀과 함께 실험을 한다. 리마 외곽 지역에 직원이 1명뿐인 조그만 의류 공장을 설립해본 것. 이들은 정부가 요구하는 모든 허가를 따내기 위해 날마다 여섯 시간씩 서류 작업에 매달렸다. 289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사업자등록을 할 수 있었다. 사업자등록에 들어간 비용은 직원의 한 달치 월급(최저임금)보다 31배나 많았다.
그는 페루에서 사업하기 어려운 이유를 시스템 공백에서 찾았다. 자산이 자본이 되려면 소유권 등록·운영 시스템이 잘 정비돼야 한다. 그래야 부동산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하고, 그 돈으로 사업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직후의 정책 혼돈으로 인해 합법적으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는 게 데소토의 분석이다.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려면 호수에 수력 발전소를 설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려면 자산을 합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체제부터 갖춰야 한다. 지금 개발도상국가들에 있는 자산은 안데스산맥 꼭대기에 있는 호숫물과 다름없다.”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그림의 떡’이란 얘기다. 그래서 데소토는 소유권을 명시화하고, 그 정보를 포괄적 체계로 통합하며, 거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시스템을 ‘자산을 연결시키는 네트워크’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암호화 기술로 무형의 자산에 소유권을 명시하는 시스템, 즉 비트코인이나 NFT의 초석을 발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데소토의 어떤 문장은 마치 미래를 예견하고 암호화폐나 NFT 생태계를 옹호하는 것처럼 읽힌다. 그는 말한다. “글과 전자화폐, 사이버 기호와 재산문서를 아무리 비난하고 혹평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명시화 체제를 더욱 단순하고 보다 투명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데소토는 블록체인 기술을 초기부터 지지한 경제학자다. 메타버스 시대, 디지털 권리 설정은 왜 중요한가. 20여년 전 쓰인 ≪자본의 미스터리≫가 품고 있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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