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대법원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의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가 합리적 이유가 없는 연령차별이라며 무효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이 임금피크제 효력의 판단 기준을 밝히고 그 무효를 선언한 첫 사례다.
이 판결이 알려지자 법조계, 노동계는 물론 우리 사회 전반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임금피크제 논쟁이 벌어지고 노사 간 긴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대법원 공보연구관실은 판결과 동시에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고용노동부,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노동조합총연맹도 입장을 밝혔다. 각종 매체가 뉴스, 해설기사, 사설, 전문가 칼럼을 매일 쏟아내면서 임금피크제 분쟁 현황과 쟁점을 재조명했다. 경제단체 세미나와 노조 설명회가 연달아 열렸다. 잠재 분쟁에 대비한 기업 자문 요청이 쏟아지는 한편 노조의 소송인단 모집, 최고장 발송도 이어졌다. 급기야 6월 초 창원에서 100명 이상 직원이 소송인단을 구성, 임금피크제 무효를 주장하는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하나의 판결을 두고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런 소란이 펼쳐지는 일은 드물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과 임금피크제 분쟁이 수많은 집단소송을 낳고 인사제도를 대폭 변경하도록 할 만한 폭발력이 있다는 염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관심이 집중된 만큼 밀도 있는 논의가 이뤄진 데다 지난 16일 KT의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가 유효하다는 판결이 나온 덕분에 임금피크제 논의는 차분하게 큰 흐름을 정리할 시점이 온 것 같다. 이제 임금피크제 시행 기업은 대법원 판결과 KT 판결의 의미, 이를 둘러싼 논쟁과 노사 대응 양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기업별로 닥칠 수 있는 분쟁과 노사 갈등을 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중 첫째와 둘째 메시지는 큰 논란거리가 아니다. 임금피크제가 고령자고용법상 차별금지 기준을 지켜야 함은 당연하다. 4대 기준은 모두 차별 판단에서 고려해야 하는 합리적 기준이다. 더구나 “(4대 기준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하여, 대법원은 사정에 따라 다른 기준 내지 요소도 추가로 고려할 여지를 남겼다. 그런데 셋째 메시지, 즉 이번 판결이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에도 확대 적용되고 그 결과 임금피크제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 메시지가 바로 앞서 본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셋째 메시지는 판결문에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4대 기준은 임금피크제 유형을 불문하고 적용되는 일반적 기준의 형식을 띠는 점, 결과적으로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의 임금피크제를 무효라고 선언한 점을 생각하면, 판결을 접한 노사 뇌리에 저절로 떠오르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대법원은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분쟁에도 이번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도록 방향 제시를 한 것인지, 고령자고용법 취지에 따른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보다 유효성 판단에서 더 유리하게 취급할 여지는 없는지, 이번 판결로 우리 기업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와 마찬가지로 무효가 될 가능성이 없는지, 변경해야 한다면 언제 어떻게 변경할지 등 지금 펼쳐지는 임금피크제 논쟁의 핵심 이슈가 여기서 나온다.
사안에서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은 고령자고용법 개정으로 2013년 정년이 60세 이상으로 법제화되기 한참 전부터 정년이 61세였고, 2009년에 정년 61세를 유지하면서 만 55세 이상 직원의 임금을 하향 조정하는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대부분 기업은 고령자고용법 개정 전에는 정년 연령이 60세 미만이었고, 그 개정과 시행을 계기로 정년을 60세로 상향하면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시행한 점에서 한국전자기술연구원과는 사정이 다르다. 2021년 고용부 ‘사업체 노동력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7만6507개 사업체 중 87.3%가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 이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사실과 대법원 판결 직후 경총이 실시한 ‘30대 기업 긴급 임금피크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 23곳 중 1곳을 제외하고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시행한 사실은 그런 실태를 보여준다.
이런 배경상 향후 대법원이 제시한 4대 기준이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에도 그대로 그 특수성에 관한 고려 없이 적용돼 결과적으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하는 판결이 잇따라 나온다면 전 산업에 걸쳐 기업 경영상 혼란이 불가피하다.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에게 미지급 임금을 소급 지급해야 함은 물론 기존 임금피크제를 전제로 한 정년, 채용, 직무, 복리후생, 희망퇴직 등 제도 전반을 손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초래될 노사 갈등, 노동청 진정, 고소, 민사소송 등 법적 분쟁으로 인한 부담은 노사 할 것 없이 대단히 클 것이다. 이것이 아마 기업 입장에서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일 것이다.
통상임금 분쟁과 비교한 이유는 임금피크제 분쟁은 통상임금 분쟁을 연상하게 하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임금 분쟁인 점, 오랜 노사 대립이 있었던 쟁점에 대해 노측 손을 들어준 대법원 판결로 촉발된 점, 판결 직후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집단소송 움직임이 활발히 나타난 점에서 양자는 비슷하다. 대법원 판결 후 임금피크제 분쟁이 제2의 통상임금 분쟁이 될 수 있다는 언급이 곳곳에서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대법원이 제시한 4대 기준은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유효성 판단에 그대로, 또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유효성 판단은 4대 기준을 참고하되 완화 적용해 이뤄지고, 고령자고용법 취지를 추가 고려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 결과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기업들의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가 대규모로 무효라고 판단될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많은 기업의 정기상여금이 무더기로 통상임금 산정에 포함된다는 판결이 내려진 통상임금 분쟁과 다른 점이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상 4대 기준이 “사업주가 근로자의 정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임금을 정년 전까지 일정 기간 삭감하는 형태의 이른바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경우”, 즉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에만 적용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고용부가 고령자고용법에 근거해 정년연장에 수반한 조치로서 노사 협의를 통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면 원칙적으로 연령차별이 아니라고 한 것도 이 점을 감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대법원 보도자료상 “하급심에서 소송이 진행 중인 개별 기업들이 시행하는 임금피크제”가 이번 판결에서 제시한 기준에 따라 효력이 판단될 것이라고 언급한 부분을 들면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에도 4대 기준이 그대로, 또 엄격하게 적용될 것으로 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표현이 그렇게 읽히는지 의문이고, 무엇보다 보도자료가 아니라 판결 원문이 대법원 입장을 판단하는 준거가 돼야 한다.
특히 지난 16일 KT의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가 연령차별이 아니라는 1심 판결이 내려졌다. KT 판결은 5월 26일 대법원 판결을 인용하며 내려진 최초의 판결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유효성 판단 기준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데 4대 기준을 완화해서 적용하고 고령자고용법 취지를 고려하고 있다. 이는 향후 동종 분쟁에서 중요한 기준이 될 만하다.
구체적으로 KT 판결은 4대 기준은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 사안에 관한 법리라고 확인하고, 단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사안에 관해서도 하나의 참고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의 유효성은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보다 완화한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며,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유효성이 인정될 여지가 더 많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예컨대 △고령자고용법과 고용보험법상 정년 60세 연장에 대응해 일정 연령에 도달한 근로자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를 예정하고 있었다는 점 △임금피크제 도입 당시 인력구조 및 경영 사정을 고려할 때 인건비를 절감할 절박한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그 외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에서는 정년연장 자체가 임금 삭감에 대응하는 가장 중요한 보상이고 △연장된 근로기간에 대해 지급하는 임금이 감액된 인건비의 가장 중요한 사용처라고 한 점 △업무량이나 업무 강도 등에 관한 명시적인 저감 조치가 없었다는 사정만으로 임금피크제가 합리적 이유 없는 연령차별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한 점도 중요하다. 대법원이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의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선언하면서 임금 하락의 불이익 보전을 위한 대상 조치가 없었다는 점,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에게 부여한 목표 수준이나 업무의 내용에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은 것과 접근 방식 차이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우선 기업들 임금피크제는 정년연장형이 대다수지만 한국전자기술연구원과 같이 정년유지형을 채택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대법원 판결이 제시한 4대 기준이 그대로 적용된다.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로 KT 판결처럼 다소 완화한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도입 배경과 불이익 정도 등 사실관계에 따라 연령차별로 무효인 경우도 나올 수 있다. 다른 법원이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유효성 판단에 4대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임금피크제를 적용받고 있거나 받다가 정년퇴직한 근로자는 소(訴) 제기에 부담이 작고, 특히 통상임금 소송을 제기한 사업장의 근로자라면 학습효과로 쉽게 소를 제기할 수 있음도 고려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단체교섭에서 일단 임금피크제 무효와 폐지를 주장하는 한편 임금피크제 도입과 운영상 4대 기준이 지켜졌는지 기업을 추궁하고, 개별 직원의 소 제기를 지원할 것이다. 대법원 판결 이후 노동조합 보도자료, 세미나, 지침에서 이 점은 확인되며 KT 판결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상 특히 임금피크제가 집중 시행된 공공기관, 금융·보험산업에 속한 기업을 중심으로 임금피크제 소송이 잇따르고 노사 갈등이 깊어지는 것은 당분간 불가피하다. 임금피크제 시행 기업은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다.
노사 갈등은 다소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임금피크제 유효성에 관한 객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현행 임금피크제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이를 개선하는 등 대화와 타협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일반론이 아니다. 정년연장 문제를 다시 다룰 과제를 안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고령화 심화와 생산가능인구 부족으로, 현재의 정년 기준을 더 높일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고, 새 정부에서도 이 문제는 중요 정책과제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번 임금피크제 분쟁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이는 또다시 닥칠 정년연장 문제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유용한 사회자본으로 남을 것이다. 노사 문제를 자체 해결하지 못하고 법원 판결에 맡겨 사후적으로 해결하는 낭비적 행태는 우리 노사관계의 고질적 문제였다. 이번에는 다르기를 기대해 본다.
■ 조상욱은
통상임금, 임금피크제, 경영성과급, 불법 파견, 노사분쟁 등 전통적 영역에 관한 송무와 자문 업무를 수행하고, 아울러 중대재해, 노동조사, 협상 등 새롭게 부상하는 인접 영역에도 관심이 많은 노동 전문 변호사다. 율촌 노동팀장을 맡고 있으며 고용노동부 자문변호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율촌 경영노동포럼 의장으로서 최신 노동 현안을 주제로 정기적으로 웨비나를 연다. 2022년 1월부터 한경 CHO Insight에 문제직원 대응전략을 다루는 ‘인사병법’ 칼럼을 정기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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