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국 사활 거는데 정부는 뒷짐…반도체 생태계, 40년전보다 열악"

입력 2022-06-22 17:11   수정 2022-06-30 19:21


“이대로는 죽습니다. 1등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더 열심히 뛰어야 해요.”

한국 반도체산업 터전을 닦은 ‘원로’인 김광교 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장(82·사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김 전 연구소장은 2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요즘은 경쟁국이 어떻게 투자하는지, 기술력 수준은 어떤지가 다 드러나는 ‘오픈북’ 경쟁 시대”라며 “한국 정부는 반도체산업을 너무 쉽게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정부 차원의 투자와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었다.
◆오픈북 경쟁 시대…더 어려워
김 전 연구소장은 1979년 삼성전자에 첫 반도체연구소가 설립됐을 때부터 4년간 초대 연구소장을 지냈다. 2000년대 초까지 삼성전자 미국 프린스턴연구소장,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김 전 연구소장에게 현재의 반도체 경쟁 환경을 평가해달라고 하자 “현역으로 활동하던 30~40년 전보다 더 열악한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미국과 중국, 대만 등은 반도체 생태계에 정부가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올해부터 2026년까지 105억달러(약 11조9000억원)가량을 투입해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대만은 매년 1만 명의 신규 반도체 인재 확보 전략을 수립했다.

김 전 연구소장은 “반도체산업을 대하는 정부의 고민 자세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인력난이나 규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반도체산업이 몇 년 내 고꾸라질 수도 있다”며 “기업이 제대로 해볼 수 있도록 정부와 학계 등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밀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반도체 1위 자리를 놓치는 것은 미래 성장동력을 다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스마트폰, 자동차, 로봇 등 반도체가 들어가는 제품의 수가 계속 늘고 있어서다. 세계 반도체 매출은 지난해 약 702조원에서 2030년 약 1268조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기업 제대로 밀어줘야
삼성전자는 1974년 한국반도체를 50만달러에 인수하면서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김 전 연구소장은 “삼성이 처음부터 반도체 사업을 잘한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업 초기만 해도 미국과 일본에 비해 기술력이 10년 이상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았다”며 “당시엔 반도체로 발령하면 퇴직하겠다는 직원도 있을 만큼 상황이 열악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일본에 기술 제휴나 도입을 요청해도 ‘너희는 아직 그럴 수준이 안 된다’며 창피·멸시를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이 와중에도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은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다. 꼭 1등을 하자’며 기술·인력 투자에 집중했다”고 덧붙였다.

이때부터 이어진 지속적인 투자가 지금의 ‘1등 반도체 삼성전자’를 만들었다는 게 김 전 연구소장의 설명이었다. 운도 따랐다. 1980년대 저금리·저유가·낮은 원화 가치 등 ‘3저 호황’이 맞물리면서 삼성전자 반도체의 위상이 빠르게 올라갔다.

김 전 연구소장은 “착실히 준비해야 기회를 살릴 수 있다는 점은 1970~1980년대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10년 뒤, 20년 뒤를 내다보며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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