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독일 회화 작가 다니엘 리히터(60·사진)의 그림은 찰리 채플린의 이 명언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감한 네온사인의 이미지와 다채로운 색으로 시선을 사로잡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에는 사회의 문제의식, 비주류의 고독이 숨어 있다.
리히터의 아시아 첫 개인전 ‘나의 미치광이 이웃(My Lunatic Neighbar)’이 23일부터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열린다. 그의 화풍을 시대별로 볼 수 있는 대표작 25점이 걸린다. 리히터는 지난 21일 영상인터뷰에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당대 상황이나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며 “지난 10~12년 동안 자유로운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지점을 찾기 위해 정치·사회적 이슈를 창작의 영감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1990년대는 설치미술과 미디어아트, 개념미술이 꽃을 피우던 시기다. 리히터는 이런 사조에 휘말리지 않고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단순 추상 회화 같았던 그의 작업에 서사가 덧입혀지며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났다.
리히터의 작품 세계는 그야말로 방대하다. 규칙도 없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지루해진다”는 작가의 말처럼 특정 시기마다 회화의 장르가 다양하게 변주된다. 1990년대 추상회화의 자유로움을 실험했다면, 2000년대 들어선 사회적 이슈를 환각적이면서도 거친 화풍으로 그려냈다.
이번 전시에 걸린 ‘피녹스’(2000)는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동시에 벌어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보기에 따라 베를린 장벽 붕괴의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형광색을 덧입히고 사람들의 형체를 뭉개 멀리서 보면 열화상 카메라로 찍은 파티 장면 같다.
그는 “예술은 기존의 상식과 지식을 깰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시 제목에서 이웃의 영어 철자를 neighbor가 아닌 neighbar로 변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11년엔 작가는 ‘낭만’이란 주제를 탐구했다. ‘그러나 너를 돕는 건 내 본성에 어긋나, 늑대가 말했다’(2011)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대표작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2015년 이후 추상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회화로 또다시 변화를 시도했다. 인체의 형상에 집중하면서 나이프, 붓 등을 자유롭게 활용한다. 강렬한 색과 선으로 인물의 행동을 단순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강한 실루엣과 원색의 표현이 인상적인 ‘눈물과 침’(2021)이 대표작이다. 1차 세계대전 때 다리 잃은 두 소년 병사가 목발을 짚고 걸어가는 엽서 사진을 참조했는데 그림 속 인물들은 펑크 스타일의 화려한 나비처럼 역동적인 존재로 읽힌다. 전시는 오는 9월 28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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