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노을 드리운 언덕에 서서

입력 2022-06-23 17:34   수정 2022-06-24 00:03

따스한 햇살이 비쳐 드는 일요일 아침 화장기 없는 아내와 마주 앉아 차 한 잔 나눌 때 나는 행복하다. 밤과 낮의 구별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그 시절에 어려운 고비마다 늘 곁에서 말없이 힘이 되어주던 아내, 자식들 다 키워내고 이제는 둘만 남아 세월의 주름을 곱게 지닌 아내와 이렇게 마주하며 차를 나누는 이 시간이 행복한 것이다.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시점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보이는 것이다. 가끔 하늘의 별을 보라, 자기의 존재가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알게 된다.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는 군상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하늘의 별이,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아내의 소중함이,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은의 시처럼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 내려갈 때 보이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하고 풀 수 없는 문제를 안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이제 다 내려놓고, 살아 온 날을 감사하면서 그날그날 일상의 즐거움을 찾으며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하지만 하루를 인생에 비유해 보면 지금 내 시기는 한창 햇빛이 내리쬐는 사회에서의 활동기가 벌써 지나고 곧 해가 지는 노을이 드리워지는 시간이다. 아내와 나는 같이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나이다.

노을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온종일 모든 생명체에게 빛과 열을 고루고루 나누어주고 저 고마운 태양도 쉬러 간다. 할 일 다 하고 난 뒤의 안도감, 이제 쉬어도 된다는 해방감-노을은 노을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런 편안함을 준다.

지금의 내 모습도 사람들에게 이런 편안함을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해가 진다고 하루가 끝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젊음이 없다고 인생이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아침의 신선함과 한낮의 태양과는 또 다른 밤의 신비함이 아직 내 삶에 남아 있다고 믿고 싶다. 찬란한 별이 뜨는 경건한 밤을 위해 노을 드리운 지금의 내 시간을 후회 없이 살고 싶다. 노을처럼 남에게 편안함을 주는 넉넉한 아름다운 노을이 되고 싶다. 말년의 내 삶의 모습이 해 질 녘의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고 싶은 것이다.

거창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잔잔히 스미는 차 향기 같은 행복이 이 시간 나를 평화롭게 한다. 좀 더 많은 것을 갖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이 작은 행복이 주는 큰 기쁨을 알 수 있을까. 성취의 청춘도 아름답지만 비움의 노년은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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