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1절 가사다. ‘흥남부두, 일사’라는 단어를 보고도 어떤 상황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복거일 저자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사회평론가다. 역사학자가 아닌 그가 6·25전쟁에 관한 책을 쓴 이유는 서문에 잘 나와 있다. ‘그동안 북한으로 기우는 지식인들이 북한의 침입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려고 시도해서, 우리 사회에선 그 전쟁의 과정보다 오히려 기원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답답함에 직접 6·25전쟁을 기록하게 됐다는 저자는 ‘시간에 쫓기는 일반인들이 그 전쟁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역사학자가 아닌 나로선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토로하며 ‘오랜 모색에서 나온 해법은 전쟁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전투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방안이었다’고 방법론을 전한다. 6·25전쟁의 기원에 이어 춘천지구 전투, 다부동 전투, 인천상륙작전, 운산 전투,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작전, 지평리 전투, 임진강 전투, 용문산 전투, 휴전 회담을 차례로 기술했다.
6·25전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1950년 냉전이 치열해지면서 소련의 유럽 팽창정책이 미국과 서유럽 여러 나라의 대응으로 막히게 된다. 그러자 소련의 스탈린은 동아시아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마오쩌둥의 야심을 부추긴다. 6·25전쟁은 세 공산주의 지도자의 합작품이었다.
북한군은 소련군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고 신형 무기를 제공받았다. 훈련이 미흡하고 장비도 허술했던 한국군은 전혀 예상 못한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에게 침공당했다.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적군에게 넘어갔을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펼쳐졌다.
6월 25일 북한군이 춘천으로도 몰려 내려왔지만 한국군은 지형을 잘 활용해 방어했다. 6사단이 3일 동안 춘천을 지킴으로써 북한군의 작전 계획이 크게 뒤틀어졌다. 패전한 부대들을 추슬러서 한강선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우리를 도와줄 유엔군이 도착했다. 춘천지구 전투는 전쟁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전투로 평가받는다.
중공군이 압도적 병력으로 미군을 섬멸하려던 장진호 전투에서 예상과 달리 미 1해병사단이 중공군 9병단을 물리치고 큰 손실을 입혔다. 이로 인해 아군은 재정비할 여유를 얻었다.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할 위험이 커지자 미군은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했다. 흥남항에서 해상철수작전을 펼칠 때 8만7400명의 병력뿐만 아니라 민간인 10만여 명을 구출했다. 특히 1만4000명의 민간인을 거제도까지 무사히 데리고 온 메리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 최다 인원 구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하지만 배가 부족해 많은 피난민이 흥남부두에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흥남부두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이들을 생각하며 실향민들이 눈물로 불렀던 노래가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였다.
6·25전쟁에서 300만 명의 북한 주민과 50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죽었다. 유엔군은 40만 명, 공산군은 200만 명 넘는 사상자를 냈다. 6·25전쟁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이었다. 저자는 ‘우리의 모습을 다듬어낸 힘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역사적 사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6·25전쟁을 깊이 살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