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는 한국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투자가 활발하고, 주요 원자재 보고(寶庫)인 만큼 공급망 위기 탈출을 위해서도 긴밀한 협력이 절실한 곳이다. 이 지역 경제는 한국 경제에 무역흑자를 안겨주는 ‘효자 시장’으로 통했지만, 2020년부터 적자 기조로 돌아선 터라 미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가 그만큼 더 크다.
과연 중남미 지역의 새 좌파 물결이 우리의 국익과 기업에 위협일까. 일반적으로 ‘핑크 타이드(Pink Tide)’라고 부르는 20년 전과 현재의 정치 조류는 다음 네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이전 물결은 1990년대 시장경제 개혁 실패와 환멸에서 비롯한 반작용으로서 과격한 사회주의·민족주의 바람이 거셌고 일부 국가에서는 내·외국인 기업 국유화도 단행했다. 그러나 현재의 물결은 양극화, 부정부패, 범죄 만연,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미숙 등 실정에 대한 심판 성격이 강하다. 더군다나 최근 초인플레이션과 대량 난민을 유발한 베네수엘라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22번이나 받은 아르헨티나의 극단적인 정부 실패는 반면교사로서 여타 좌파 정부의 선택지를 좁히는 역할을 한다.
둘째, 최근 득세한 세력은 기성 정당이 아니라 신진 세력이다. 유권자들은 원자재 붐으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도 재정운용에 실패한 기존 좌파 정당과 재래식 자원수출 기반 경제모델에 안주하며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일관한 우파 정당 모두에 등을 돌렸다. 다만 신세력은 이데올로기적 정책 노선이 선명하지 않은 데다 당 조직과 의회 기반이 취약해 좌·우파 기성 정치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미 멕시코와 페루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났고, 콜롬비아의 페트로 역시 ‘토지 민주화(토지 재분배)’ 등 선거 공약을 실행할 경우 극심한 혼란이 예상된다.
셋째, 이전 물결 때 중남미 국가들은 외교정책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지금은 각자도생이다. 당시에는 반미 블록 등 각종 정책협의체를 출범시켰다. 심지어 쿠바가 미주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미국이 반대하면 모두 보이콧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쿠바 초청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달 초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차 미주정상회의에는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가 초청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등 일부 국가 정상만 불만 표시로 불참했을 뿐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의 좌파 지도자들은 참석해 각자의 국익을 좇는 사분오열 양상이 나타났다.
넷째, 전통적 지역 패권자인 미국의 대안으로서 이전 좌파 물결을 타고 부상한 중국은 자원 개발 및 수입, 금융 지원, 인프라 투자, 통신기술, 코로나 백신 협력 등을 통해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키워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 경제 둔화와 남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지에서의 중국 진출 부작용 등을 계기로 중국 자본과 기술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즉 중남미 지역 국제관계의 2단계 다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남미의 신좌파 정부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 적대적 노선보다는 실용주의로 수렴할 가능성이 크다. 원자재 붐이 꺼진 뒤에도 경제가 안정 성장하고 소비자의 구매력이 살아있기를 바라는 신정부들의 정책목표는 이 지역 시장 수출 증대라는 한국의 통상정책 이해와도 일치한다. 이들 정부는 이를 위해 민생 해결과 함께 기후변화에 대응한 지속 가능한 개발 모델로서 신재생에너지산업, 기초 제조업, 농업 등을 강화한다는 방침이고, 산업화와 경제·사회 개발에 성공한 한국 모델의 소프트파워에 매료돼 있다.
올해는 한국이 중남미 15개국과 국교를 수립한 지 60돌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중남미 지역의 좌파 물결을 일률적으로 위협으로 보지 말고 각국의 전략적 필요와 개발 아젠다에 따라 현지 투자, 개발금융, 기술 협력, 시장 진출을 적극 확대함으로써 협력 수준을 격상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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