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1990년대 미국의 최정상 슈퍼모델 신디 크로퍼드 등이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채 화면에 등장한다. 크로퍼드의 강렬한 레드 립과 함께 화면 속에는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여성으로 만들어드립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미국 대표 화장품 기업 레브론의 전성기 시절 TV 광고다.
4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상황은 바뀌었다. 정작 레브론 화장품이 사람들 뇌리에서 잊힐 위기에 놓였다. 레브론이 이달 중순 미국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다.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대표 화장품 기업의 치욕으로 꼽히는 순간이다.
하지만 26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근본 원인을 다른 데서 짚었다. 레브론이 지난 20년간 급변하는 화장품 시장의 판도를 따라잡지 못해 판매가 부진해졌다는 지적이다. FT는 "레브론이 근본적인 혁신에 실패한 탓에 엘리자베스 아덴을 인수한 이후에도 적자를 면치 못했다"고 보도했다.
식품, 생활용품 등과 달리 화장품은 트렌드에 유독 민감하다. 아름다움을 향한 소비자들의 욕구가 빠르게 진화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뷰티 소비자들은 대기업 제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열성 구매자'로 머무르지 않는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수 리한나, 인플루언서 카일리 제너 등 유명인들이 선보이는 독립 브랜드들에 금세 눈을 돌리고 쉽게 갈아탄다.
미국 투자은행 제프리스는 "인디 화장품 브랜드들은 끊임없이 위험을 감수하고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면서 "대형 뷰티기업들은 수백 마리 토끼들과의 경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거북이인 셈"이라고 분석했다.
레브론과 비슷하게 2000년대 들어 확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화장품 기업 코티(Cotty)도 최근에서야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영국의 유명 틱톡 인플루언서에게 자사 브랜드 림멜의 신상 마스카라 홍보를 맡긴 것이다. 코티 측 관계자는 "회사 설립 이래 이런 시도를 한 건 처음"이라면서 "인디 브랜드들의 강점인 바이럴 마케팅을 배운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반면 레브론은 트렌드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형형색색의 매니큐어, 색조 메이크업 등에만 편중된 제품군은 스킨케어를 통해 '피부 미인'과 '자연스러운 화장'을 선호하게 된 2030 여성들의 마음을 더 이상 사로잡지 못했다. 화장품 소비층이 탄탄한 중국 시장에 대한 공략에 실패한 것도 또 다른 원인으로 꼽힌다. FT는 "레브론이 엘리자베스 아덴 인수에 무리한 투자를 한 탓에 그 이후 제품군을 새로 개발하거나 인디 브랜드를 발굴하는 데 쓸 자금이 모자라게 되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현재까지 씨티그룹이 기존 채권단으로부터 돌려받은 금액은 4억달러에 불과하다. HPS인베스트먼트 등 레브론의 2016년 채권단은 씨티그룹에 원금을 돌려주지 않는 이유에 대해 "레브론이 우리 기존 채권단의 담보물을 빼돌렸고, 씨티그룹이 그 과정을 자문했다"고 맞서고 있다. FT는 "지금으로선 레브론이 돈을 갚아야 할 채권자들의 명단조차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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