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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플레이션과 금리인상 기조로 벤처투자시장이 얼어붙고 있습니다. 스타트업들이 투자 혹한기를 겪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국내 시장에선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허용된 일반지주회사 CVC(기업형 벤처캐피털)가 투자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큽니다. 이미 미국에서 CVC는 전체 벤처투자의 절반 가까이를 책임질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애플 구글 등 글로벌 빅테크들에게 CVC는 혁신의 핵심 비결이기도 합니다. 디지털 전환이라는 생존 경쟁에 직면한 국내 대기업도 CVC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법무법인 화우의 홍정석 변호사가 글로벌 빅테크의 CVC 투자 성공 사례를 통해 국내 대기업의 CVC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작년 하반기 한국 주식시장이 시들해질 무렵, 하루가 멀다고 치솟는 나스닥을 보며 많은 국내 투자자들이 미국 시장으로 몰려들 때 필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 무렵부터 CVC(기업형 벤처캐피털)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주식은 다름 아닌 구글이었다. 데이터가 자산이고 수익이 되는 ‘빅데이터’ 시대에 유튜브, 플레이스토어, 안드로이드, 검색엔진을 통해 구글에 각종 정보를 의지와 상관없이 아낌없이 제공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구글이 미래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구글의 미래에 대한 투자방식이 너무나 획기적이었기 때문이다. 피터 린치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회사의 주식을 사라’고 했던가. 필자의 모든 일상은 구글을 가리키고 있었다. 심지어 “헤이 구글~ 아이유 노래 틀어줘”라고 하면 무더위를 날려버릴 “내 손을 잡아” 라이브 영상을 유튜브 뮤직으로 틀어주는 전지전능한 회사가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가 “헤이 구글~”이라며 자주 부르는 스마트 스피커는 엄밀히 말하자면 구글의 제품이 아니라, 구글의 자회사인 네스트(Nest)의 제품이다. 사실 구글 역시 알파벳이라는 지주회사의 자회사인데, 알파벳에는 인공지능(AI) 바둑왕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 자율주행 자동차를 개발하는 웨이모를 비롯해 혁신을 선도하는 수많은 벤처기업이 자회사로 있다. 스마트 홈디바이스 회사인 네스트 역시 2019년 구글의 자회사로 편입됐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네스트가 알파벳의 CVC 투자를 받고 성공한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이라는 점이다.
CVC는 일반적으로 법인이 대주주인 벤처캐피털을 의미한다. 기업의 가치 성장을 기다려 시세 차익을 얻는 재무적 투자를 주로 하는 기존 벤처캐피털(VC)의 역할에서 한 발 더 나가, 전략적 투자(SI)가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성장할 것 같은 회사의 지분을 매매하여 이익을 얻는 전통적인 투자 방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주 회사의 기존사업과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도록 벤처기업의 사업을 활용하거나 직접 대주주인 회사가 해당 벤처기업을 인수해 회사가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도록 돕는 방식이다.
CVC 투자의 전형, 구글의 네스트 투자
네스트 사례를 살펴보자. 스마트 홈디바이스 벤처기업 네스트는 사용자의 움직임과 사용패턴을 스스로 학습하여, 최적의 가정환경(온도, 습도 등)을 제공하는 스마트 온도조절 장치와 가정 구조를 인식하여 화재 시 발화 지점을 스마트폰 등에 알릴 수 있는 연기 감지장치를 개발한 하드웨어 스타트업이었다.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으로 인기를 끈 네스트는 그 자체로 훌륭한 잠재력을 가진 회사였지만, 구글은 CVC 투자과정에서 사람의 목소리, 생활 패턴 등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데이터가 입혀진다면 네스트가 더 파괴력 있는 회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머신러닝, 딥러닝 등을 통해 스마트 홈디바이스의 성능을 고도화하기 위해서는 빅데이터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또 구글의 입장에선 전 세계에 퍼져있는 네스트의 스마트 홈디바이스 네트워크는 IoT(사물인터넷)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발판은 물론, 새로운 데이터 수집원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결국 네스트의 전략적 가치를 확인한 알파벳은 2014년에 3조4000억 가량에 직접 네스트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2019년에는 네스트와 구글의 시너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네스트를 구글의 자회사로 전환했다.
실제로 구글은 2019년 여름과 2020년 봄에 구글의 클라우드 사용자와 유튜브 프리미엄 사용자들에게 홈미니 스마트스피커를 무료로 배포했는데, 이는 네스트와 구글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보로 보인다. 필자도 2020년 유튜브 프리미엄 이용자로서 구글 홈미니를 수령했었는데, 구글은 이제 스마트 스피커를 통해서도 필자의 수많은 데이터(목소리, 음악취향)를 수집하고 있을 것이다. 스마트 스피커로 확보된 데이터들로 구글은 스마트 기기들이 한국어를 더 자연스럽게 말하고 듣고 쓸 수 있게 할 것이며, 사용자들의 유튜브 알고리즘을 정교화하여 아이유의 노래를 더 오랫동안 듣게 할 것이다. 이러한 데이터들은 구글만의 대체 불가한 자산이 될 것이다.
구글은 네스트에 대한 CVC 투자를 통해 주식 가치 상승에 따른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음은 물론, CVC를 통한 투자 이후 네스트를 전략적으로 인수하면서 신사업 확대와 빅데이터 정교화라는 전략적 성장도 챙길 수 있었다.
구글이 블루보틀에 투자한 이유
네스트 사례를 보면 구글 CVC가 자사에 도움이 될 것 같은 테크기업에만 투자할 것 같지만, 다른 투자 사례들을 살펴보면 항상 그런 것도 아니다. 커피 업체인 블루보틀이 또 다른 대표적 성공 사례이다.한때 서울 성수동을 뜨겁게 달궜던 파란 병이 그려진 커피와 세계적인 빅테크 기업이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구글 CVC는 2012년 블루보틀에 200만 달러 정도를 투자했다.
흔히 벤처기업의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하는 투자자를 액셀러레이터라고 부른다. 액셀러레이터는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멘토링을 제공하고, 기술을 교육하면서 스타트업을 지원 사격한다. 구글은 액셀러레이터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디자인 스프린트'라는 형태의 컨설팅을 운영하고 있다. 디자인 스프린트는 브레인스토밍 및 목표설정, 해결 방안 스케치, 솔루션 결정, 시제품 개발, 테스트를 단 5일 안에 진행하는 압축적인 문제해결 방법이다.
커피에는 자신이 있었고 더 많은 사람이 자기 커피를 맛보길 바란 블루보틀이지만, 커피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집단에 마케팅 능력이나 온라인 판매 능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블루보틀의 고민을 간파한 구글은 디자인 스프린트를 거쳐 블루보틀의 온라인 판매 웹페이지를 개설했다. 그 결과 블루보틀의 온라인 판매 비중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블루보틀은 구독경제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인 2014년부터 원두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블루보틀의 가치는 수직으로 상승했고, 2017년 구글 CVC는 블루보틀의 지분을 글로벌 식품기업 네슬레에 매각해 4억2500만 달러를 손에 쥐었다.
美 벤처자금의 절반은 CVC
이미 미국에서는 CVC가 벤처투자시장의 절40~50% 가량을 차지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는 딜을 성사하고 있다. CB인사이트에 따르면 2021년 미국 CVC가 지원한 벤처 자금은 869억달러로 2020년의 405억달러 대비 115% 급증했다. 특히 커먼웰스 퓨전 시스템, 레이스워크, 디보티드헬스 등 1억달러 이상의 대규모 투자라운드의 3분의 2는 CVC 자금으로 조사됐다.
인텔, 퀄컴,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이나 빅테크 기업들은 CVC를 통해 벤처 시장에 투자하고 있으며, 앞서 살펴본 빅테크의 대표주자 구글은 Capital G(후기단계 벤처기업 투자), GV(초기 단계 벤처기업 투자), Gradient G(AI 기반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초기 단계 벤처기업 투자) 등 세분된 CVC를 운영하고 있다. 구글은 CVC를 세분화함으로써 투자 분야에 대한 전문성 확보는 물론, 가벼운 조직을 활용해 속도감 있는 의사결정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인 일본과 중국에서도 CVC 투자의 비중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국내도 대기업 벤처투자 길 열려
한국은 금산분리 원칙상 기업이 벤처투자를 하려면 해외 계열사를 이용하거나 지주회사 체계 밖의 계열사를 활용하는 등 복잡한 우회로를 거쳐야만 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30일 시행된 공정거래법은 경제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벤처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기업들에 벤처투자의 문호를 개방했다. 일반지주회사의 기업형 벤처캐피털 보유를 허용하면서 일반지주회사가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 또는 신기술사업금융전문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산업자본인 지주회사가 투자회사인 CVC를 설립할 수 있게 된 것은 의미 있는 변화다. 하지만, 해외업체 투자 비율 제한과 외부자금 출자 비율 제한 등 각종 규제로 인해 업계에서는 CVC 제도가 활성화에 대한 물음표가 항상 따라다녔다. 배달의민족이 독일회사인 딜리버리히어로에 팔린다는 소식에는 온 국민이 분노하는데, 정작 한국의 CVC는 해외 투자가 제한되어 성과를 창출하기 어렵고,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레버리지가 필요한데 레버리지 활용 가능성도 일반적인 벤처캐피털 형태인 신기술사업투자조합이나 창업투자회사에 비해 4.5배~10배는 적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가 여러 지주회사의 CVC 등록을 자문하면서 해당 규제로 인해 막상 CVC 설립을 망설이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규제 완화와 민간 주도 성장을 강조하며 ‘지주회사 CVC 제도의 빠른 시장 안착 지원’을 110대 국정과제에 포함했다. CVC 관련 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 중소기업벤처부, 금융감독원은 신정부의 기조에 발맞추어 CVC 관련 간담회도 개최하고 별도의 태스크포스(TF)도 만들어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을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이에 관련 업계에는 기존 투자 비율 제한이나 외부자금 출자 비율 제한과 같은 규제가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최근 벤처투자육성과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정책들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한국의 구글은 어디?
대기업들의 과감한 체질 개선이 최대 화두인 요즘 기업들의 CVC 경쟁이 시작됐다. 일반 지주회사로는 동원기술투자가 최초로 신기술사업투자조합 등록을 완료했다. 10대 그룹 중에서는 GS그룹이 설립한 GS벤처스가 처음으로 등록을 마쳤다. 특히 GS벤처스는 작년 국내 벤처기업 하이퍼커넥트를 미국 매치그룹에 매각하면서 2조원 '잭폿'을 터뜨린 인수합병(M&A) 전문가 허준녕 부사장을 대표로 선임하면서 공격적인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GS벤처스의 1호 투자 대상이 어디일지를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잠재력 있는 벤처기업을 선점하기 위해 앞다투어 CVC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구글 CVC가 성공적인 투자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 없는 유니콘들을 적시에 알아보고 또 선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니콘이 왜 유니콘인가. 그만큼 희소하고, 수많은 실패를 보상할 만큼 시장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하나둘 CVC 시장으로 뛰어드는 대기업들 사이에서 누가 먼저 발 빠르게 유니콘을 찾아내고 또 키워낼지가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은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잠자는 동안에도 돈이 들어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당신은 죽을 때까지 일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레이 달리오는 “현금은 쓰레기”라고 말했을 정도다. 회사의 미래 먹거리 확보와 투자 수익을 위한 적극적인 투자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앞으로 누가 한국의 구글이 될 것인가. CVC의 역할이 기대된다.
홍정석 | 법무법인(유) 화우 파트너 변호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마케팅 전공)을 졸업하고 LG경제연구원에서 인하우스 컨설팅 및 마케팅을 연구했습니다. 이후 변호사로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별검사팀에 합류해 부대변인으로 활동했고, 공정거래위원회 소비자정책국 할부거래과장으로 재직하며 공유 경제 및 온라인 플랫폼 관련 정책 수립과 사건처리를 담당했습니다. 법무법인(유) 화우의 파트너변호사로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허용된 일반지주회사 CVC 분야 대기업 1호 등록을 이끌어내며 현재 다수 지주회사의 CVC 설립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직종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벤처기업 육성과 투자 활성화를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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