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할거면 은퇴하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총상금 900만 달러)을 앞둔 지난 20일, 전인지(28)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오랜 스승이자 코치인 박원 JTBC 해설위원이 "요즘 경기보니 샷에 영혼이 실리지 않은 것 같다"며 은퇴를 권유한 것. 박 위원은 "기술적 완성도로 보면 벌써 몇 번은 우승을 해야하는데 퍼즐 한조각이 빠진 느낌이어서 극약처방을 내렸다"고 털어놨다.
지난 3년간 긴 슬럼프를 겪는 동안에도 골프에 대한 열정을 살려주려 애썼던 스승의 말이기에 전인지가 느낀 충격은 더욱 컸다. 오랜 미국 생활에서 얻은 외로움, 2018년 10월 LPGA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이후 잡힐듯 잡히지 않는 우승이 주는 불안함에 서러움이 더해졌다. 결국 언니에게 전화해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그래도 눈물을 닦은 전인지는 "아직은 골프를 잘하고 싶다"는 진심을 확인했다.
그렇게 선 KPMG 여자 PGA챔피언십 무대. 전인지의 눈빛은 이전 두 대회와는 확연히 달라져있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우면서도 한샷 한샷 더할 나위없이 공들여치는 원래의 모습이 나왔다. 결국 27일 미국 메릴랜드주 베세즈다의 콩그레셔널CC(파72)에서 열린 최종라운드에서 전인지는 최종 합계 5언더파 283타로 렉시 톰슨(27·미국)과 이민지(26·호주)를 1타차로 제치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3년 8개월만에 만들어낸 투어 통산 4승이자 세번째 메이저 우승이었다.
하지만 2018년 이후 우승 소식이 끊기며 깊은 슬럼프가 시작됐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주변의 기대는 그의 자신감을 좀먹었다. 2020년 세계랭킹 61위까지 떨어지면서 골프를 접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전향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전인지는 골프를 끝내 놓지 않았다. 지난해 9개 대회에서 톱10을 기록하며 시동을 건 그는 지난 3월 HSBC 월드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부활을 예고했다.
올 시즌 세번째 메이저대회였던 이번 대회를 앞두고 전인지는 비밀병기를 준비했다. 하이브리드 클럽 두개를 빼고 새롭게 추가한 7번·9번 우드다. 이번 대회가 열린 콩그레셔널CC은 같은 기간 열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트래블러스 챔피언십 대회장인 TPC리버하이랜드보다 전장이 50야드 더 길다. 여기에 그린이 단단하고 바람도 강했다. 먼 거리를 보내면서도 그린을 정확하게 공략할 수 있는 클럽이 필요한 상황. 전인지와 핑은 여러번의 협업을 거쳐 높은 탄도와 스핀을 만들어낼 수 있는 7번·9번 우드를 맞춤제작했다.
이번 대회 직전에야 완성품이 나와 충분한 연습을 하지 못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전인지는 첫날 8언더파 64타로 코스레코드를 세우며 5타 차 선두로 나섰고 2라운드에서는 6타 차로 격차를 더 벌였다.
대회 전 '극약처방'을 내렸던 스승은 최종라운드를 앞두고는 "재밌고 즐겁게 치자"고 당부했다. "이번 대회에서 할 건 다 했어. 1, 2라운드에서 무아지경으로 신나게 치기도 했고 3라운드에서는 스트레스 속에서 고전하면서도 선방하는 경험을 했어. 이제 마지막이니까 더 많이 웃고 더 즐겁게 치자." 스승의 말에 전인지는 "믿어도 되죠?"라며 티잉구역에 올라섰다.
우승까지 가는 길은 역시나 험난했다. 톰슨이 맹추격하면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경기가 펼쳐졌고 한때 선두를 내어주기도 했다.
그래도 전인지는 웃었다. 미국 팬들의 응원도 전인지에게는 힘이 됐다고 한다. 14번홀(파4)부터 톰슨이 흔들리는 순간을 전인지는 놓치지 않았고 16번홀(파5)에서 버디를 잡아내며 동타로 따라잡았다.
결국 마지막 두개 홀 퍼트가 승부를 갈랐다. 톰슨은 17번홀(파4)에서 1m 파 퍼트를 놓치며 선두에서 내려왔고 18번홀 파퍼트를 놓치며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갈 기회를 날렸다. 전인지는 두 홀 모두 파로 지키며 '메이저 퀸'으로 우뚝 섰다. 오랜 우승갈증을 씻어낸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전인지는 이번 우승으로 박인비 이후 한국 선수로는 두 번째로 LPGA투어 커리어 그랜드 슬램 달성도 바라보게 됐다. 전인지는 “메이저 3승을 했으니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내 앞에 놓인 새로운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싶다”고 다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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