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50여 일의 모습을 보면, 솔직히 우려가 앞선다. 나는 윤 대통령이 포퓰리즘이라는 현대 정치의 블랙홀을 얕보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든다. 최근 정세를 분석하며 윤 대통령이 한 가지 주의할 바를 당부하고자 한다.
그런데 국민은 문제의 난이도를 헤아려 대통령을 평가하지 않는다. 특히 중도층으로 불리는 유권자 집단은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에 매우 민감하다. 우리나라 중도층은 서구에서처럼 좌우 이념의 중간(centrists)이 아니다. 경제적 손익에 따라 정치 지도자를 선택하는, 좋게 말하면 합리적 경제인(homo economicus),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다. 이 중도층은 벌써 윤 정부에 대한 기대를 상당 부분 접고 있다. 50% 남짓의 저조한 임기 초 지지율이 증거다.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집권 초에 곧바로 레임덕에 빠질 수도 있다.
국회에는 180석 야당이 버티고 있다. 그것도 보통 야당이 아니다. 대통령 탄핵 경험이 있고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으로 대선 불복까지 암시한, 전쟁하듯 정치하는 더불어민주당이다. 여당에서도 대통령 입지는 과거에 비해 그다지 넓지 않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에 입당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처지가 궁색해지면 여당 내부에서 야당을 자처할 국회의원이 꽤 있다. 윤 대통령의 처지는 국회에서 탄핵소추 되기 전 2004년 초의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떤가? 자칫하면 ‘문재인 시즌 2’가 시작될 판이다. 왜 그럴까. 우선 경제학이 현 물가 폭등의 원인과 해법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다 보니 “경제는 과학이 아니라 정치”(이재명 씨가 작년 12월에 했던 말이다)라고 생각하는 포퓰리스트의 목소리가 커질 여지가 있다. 경제학을 불신하며 ‘정치적 의지’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좋은 상황이 되고 있다. 정치인들이 ‘남 탓’ 정쟁을 일으키는 것도 포퓰리즘 확대의 기반이 된다. 예컨대 민주당 정치인들은 출범 한 달이 조금 넘은 새 정부에 물가 폭등 책임을 전가하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여당은 방어를 위해서라도 전 정부 책임을 물을 것이다. 경제 상황이 악화할수록 합리적 토론 대신 상대를 악마화하는 선동이 넘쳐날 것이다. 민생 위기가 심화하면 정부 빚에 관한 경계심이 약화하는 것도 포퓰리즘의 비옥한 토대가 된다. 민주당이 코로나19 위기를 명분으로 여러 차례 현금을 살포한 사례만 떠올려 봐도 이해가 될 것이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도 재정을 함부로 낭비하는 정책이 성행할 가능성이 크다.
요컨대 반(反)경제학, 남 탓 정치, 맹목적 재정관 같은 포퓰리즘 정치의 중력이 강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이 중간층 여론과 야당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다면 대중의 감정을 부추겨 정부 실패를 은폐하고 정치적 실리를 취하는 포퓰리즘의 중력장으로 곧바로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 과연 윤 대통령은 저 중력을 거슬러 이전 정부와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화물연대의 요구는 ‘안전운임제’로 불리는 최저운임의 영구화와 적용 품목 확대였다. 안전운임제는 운송 비용 변동을 조사해 법정 최저운임을 결정한다. 말하자면 강제성 있는 물가연동제라고 할 수 있다. 기름부터 타이어 같은 소모품까지 운송 비용이 천정부지로 뛰는 상황에서 운임을 물가에 연동한다는 아이디어는 매력적이다. 조직률 10%도 되지 않는 화물연대가 8일이나 파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지입차주들이 조합원 여부를 떠나 그런 아이디어를 지지한 덕분이다.
물론 비용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영업자가 비단 화물 지입차주만은 아니다. ‘치킨집’으로 상징되는 영세 자영업 대부분이 공급 과잉, 빚더미, 고령자, 대안 부재 같은 비슷한 조건 아래 놓여 있다. 식당 자영업자들은 2년간의 영업 피해를 복구하지도 못했는데 밀가루와 식용유 가격 폭등으로 올해 또 타격을 입었다. 줄도산 이야기까지 들려온다. 이들에게도 메뉴판의 물가연동제, 즉 정부가 메뉴 가격 인상의 정당성에 공신력을 부여해주고 경쟁자의 가격 덤핑도 막는 제도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모든 자영업에서 화물차 안전운임제와 같은 강제성 있는 물가연동제를 시행할 수 있는 걸까?
1970~80년대 이탈리아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기준임금에 물가상승률을 곱한 액수만큼 모든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는 ‘물가연동제(Scala mobile)’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1970년대 후반부터 국민 경제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세계적 규모의 물가 폭등과 경제 침체가 발발하자 임금과 물가가 서로를 끝없이 상승시키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물가상승률과 임금인상률이 십여 년 동안 연 20%에 달했다. 더군다나 명목임금에 맞춰 액수가 책정되는 각종 복지 지출도 폭증했다. 40~50%대였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채무 비율이 10년 만에 100~120%대로 뛰어올랐다.
만약 한국에서 모든 자영업을 대상으로 물가연동제를 시행한다면 이탈리아와 결과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가 상승으로 물가지수가 높아지면 식당, 학원, 카페, 미용실, 택시 가격이 뛰고 물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이들 서비스 가격이 상승하면 물가지수가 다시 높아진다. 물가연동 방식의 소득보장책은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저물가 상황을 전제할 때만 작동할 수 있다. 따라서 물가가 폭등하는 상황에서 화물연대의 안전운임제는 자영업자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라 특권일 수밖에 없다. 모든 자영업자가 안전운임제와 비슷한 제도를 요구하면 우리나라는 1980년대 초 이탈리아 꼴이 되고 만다.
긴급 사태로 생존 위기에 처한 시민을 구제하고 시장에서 해결되지 않는 수급 불균형에 개입하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역할이다. 다만 구제는 공평해야 하고 개입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제도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지속성이 있고, 위기가 해결된 이후 성과가 남는다. 그런데 포퓰리즘 정책은 이 모든 걸 뒤집는다. 구제 자금은 목소리가 크고 여론을 움직이는 집단에 더 많이 분배되고 정부 개입은 여론만 살피다 임시방편이 되기 일쑤다. 그리고 큰 후유증을 남긴다. 2022년 6월의 윤석열 정부는 어느 쪽이었을까? 나는 포퓰리즘에 가까웠다고 평가한다.
화물 지입차주가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안전운임제가 과적과 덤핑 완화에 효과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비상경제 상황, 다시 말해 정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때 힘 있는 조직이 정부 지원을 먼저 차지하면 자원 분배는 힘 싸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서 물가연동 방식의 수입 보장책은 물가 상승을 가속하는 탓에 지속하기 어렵다. 정부는 올해 일몰(日沒)될 예정이었던 안전운임제를 몇 년 더 연장하더라도 물가 폭등 상황에 맞게 세부 내용을 개선했어야 했다. 또한 파업으로 목소리를 얻은 자영업자만이 아니라 소리 없이 쓰러져가는 자영업자 모두를 두루 살필 수 있는 정책을 제시했어야 했다.
윤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 전후 합리적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노사 자율, 원칙과 엄단 같은 말들로 허송세월만 하다 파업 8일 차에 적당히 합의했을 뿐이다. 국회도 한심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시행된 안전운임제는 올초 평가를 통해 연장 여부를 판단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옛 여당인 민주당은 새 여당에 책임을 떠넘겼고 국민의힘은 대책은커녕 사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나는 현 정부가 이전 정부의 포퓰리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명징하게 인식했으면 한다. 포퓰리즘은 시나브로 다가온다. 경계가 보이지 않지만 한 번 넘어가면 절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처럼 어느 순간 돌아보면 포퓰리즘에 빠져 되돌아오지 못한다. 현 정부는 이전 정부를 여전히 추상적으로만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다르다”는 확신은 금물이다.
■ 한지원은
서울대 전기공학부를 졸업한 뒤 노동자운동연구소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 일해온 노동·경제 연구자다. 노동조합 등에 정책 자문과 강연 등을 하다 최근 전업 작가로 전환했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좌·우파 간의 대결이 아니라 포퓰리즘에 맞선 국민 통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동, 운동, 미래, 전략》(공저),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등을 썼으며, 최근 문재인 정부 5년간 이어진 민주주의의 퇴행을 비판적 관점에서 분석한 저서 《대통령의 숙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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