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출범한 이명박(MB) 정부 경제팀의 첫 과제는 물가와의 전쟁이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30달러까지 치솟고 미국발(發) 경기침체로 경제 전반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등 요즘과 상황이 비슷했다. 이명박 정부는 ‘물가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쌀, 밀가루, 휘발유 등 서민 생활과 밀접한 52개 품목을 선정해 집중 관리했다. 이른바 ‘MB 물가지수’였다. 당시 배추 담당 국장, 밀가루 국장까지 지정해 정부가 두더지 잡기식 가격 통제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오히려 관리 품목들의 물가가 더 많이 올라버렸다.
MB식 물가 대책 답습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윤석열 정부도 사활을 걸고 물가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가용 수단을 총동원해 국민의 생활물가 안정에 총력을 다해달라”고 주문한 뒤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때와 별반 달라진 건 없는 듯하다. 국민의힘 물가 및 민생안정특별위원회가 배추, 돼지고기 등 밥상 물가 관련 주요 농축산물 14개 품목을 물가 안정 중점 관리품목으로 지정한 것은 MB식 물가 잡기의 데자뷔다. 정부 부처가 민간 협회와 업체 관계자를 불러 모아 가격 인상 자제를 압박하고, 합동 점검반을 구성해 주유소 현장 점검에 나서는 모습도 닮았다. “고통 분담 차원에서 정유사의 초과 이익을 최소화하거나 기금 출연을 통해 환수하겠다”며 소위 ‘횡재세’를 부과하겠다고 겁박하는 정치권 행태는 도를 넘고 있다.
유류세 인하 등 미시적 물가 대책마저 소진돼 가는 상황에서 모든 경제 주체의 고통 분담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기업 팔 비틀기식의 가격 통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풍선 효과’와 ‘용수철 효과’로 다른 가격이 오르거나 일정 기간 뒤 가격이 급등한다는 게 역사적 경험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으로 대변되는 급격한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세계 각국이 자국 통화 가치 하락을 경쟁적으로 방어하려는 ‘역(逆) 환율전쟁’을 펼치고 있다. 인플레이션 뒤에는 깊고 긴 경기 침체가 뒤따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당면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고차원적 대응이 필요하다.
인플레 전쟁, 위기를 기회로
산업 구조 재편을 통한 경제 전반의 생산성 향상에 답이 있다. 고효율·저소비로 산업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동시에 미래 산업의 포트폴리오 재편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국가 경제의 생산성을 높여 비용 측면의 인플레이션을 흡수하는 창조적 파괴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동안 정보기술(IT) 혁명이 인플레이션 요인을 흡수해 왔듯이, 인공지능(AI) 등 신산업에서 생산성 혁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제조 강국인 한국 경제 체질을 연구개발(R&D) 중심으로 바꾸고, 글로벌 콘텐츠의 경쟁력을 확장하는 소프트 전략도 필수다.
1985년 플라자 합의 후 엔고로 수출에 타격을 받은 일본이 내수 진작을 위해 돈을 푸는 동안 미국은 산업구조 재편에 들어갔다. 이 결과 일본 경제는 거품이 확대된 뒤 붕괴했지만 미국은 중흥기를 맞았다. 이런 역사적 사례를 교훈 삼아 위기를 혁신 기회로 바꾸는 국가적 전략이 필요한 시기다. 그런데 정부가 쏟아내는 대책 가운데 전반적인 산업 전략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인플레이션과의 전쟁 일선에 산업 전문가들이 필요한 이유다. 정부는 민간 전문가들과 ‘원팀’을 구성해 물가·환율 전쟁을 극복하고 재도약하기 위한 산업 청사진을 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