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속 공주는 연약하다?…천편일률적 구도 뒤집어

입력 2022-06-29 17:27   수정 2022-06-29 23:41

“정은 딸 셋과 아들 넷을 두었다. 그 딸들 중 둘째인 호는 다시 딸 넷을 낳았다. 그 딸들 중 셋째인 순은 다시 딸 둘을 낳았다.” 정보라 작가(사진)의 새 단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도입부다. 성서의 창세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 구절은 이야기의 중심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기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이야기는 핏줄과 함께 여자에게서 여자에게로 전해진다.”

올해 세계 3대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 작가가 최근 이 같은 여성주의 판타지소설 일곱 편을 담은 신작 소설집 《여자들의 왕》을 출간했다.

“여자들도 상상의 주인공이자 중심이 될 권리가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뻔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고 전개를 비틀었다. 서양의 영웅담은 흔히 ‘포악한 용, 그가 납치한 연약한 공주, 용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는 용감한 기사’로 요약된다. 소설집을 여는 연작소설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 세 편은 이를 180도 뒤집었다.

용의 눈을 피해 성에 숨어든 기사가 잠든 공주에게 입을 맞추자 공주는 앵두 같은 입술을 열고 말한다. “내 칼 어디 갔어? 혹시 내 칼도 네가 숨겼냐?” 기사가 목숨을 건 칼싸움을 벌여야 하는 대상은 용이 아니라 연인이었던 공주다.

정 작가는 “공주도 사람이니까 마냥 저렇게 연약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천편일률적인 구도를 좀 뒤집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원래는 그냥 단순하게, 칼 들고 건들건들하며 ‘죽을래?’ 같은 말을 내뱉는 공주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쓰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쓰다 보니 왕비와 기사와 왕자도 각자 다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계속 썼더니 3부작이 됐다”고 설명했다.

표제작 ‘여자들의 왕’은 왕좌를 두고 여자가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가 여자를 지키거나 배반하는 이야기다. 정 작가는 “아주 농염하고 화끈한 여자들의 관능적 권력투쟁을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번 소설집은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전통적인 상상의 중심을 여성으로 옮기면 이야기가 훨씬 더 재밌어지거든요.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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