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연주, 전세계 홀렸다"…임윤찬 '악마의 협주곡' 뜯어보니 [김수현의 THE클래식]

입력 2022-07-02 07:04   수정 2023-01-25 11:22

<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모든 결선 진출자들이 빼어난 음악성과 예술성을 보였지만, 그중 단연 임윤찬이 눈에 띄었다. 그는 화려한 라흐마니노프 3번 연주에서 18세의 나이에도 이미 탁월한 깊이와 눈부신 테크닉을 보여줬다."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심사위원장이자 미국 여성 명지휘자 마린 올솝

"무대를 보고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명연으로, 이런 연주를 직접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음악의 힘이 무엇인지 깨닫고 경쟁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측 중계 해설자이자 피아니스트 엘리자베스 로
한국에서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는 피아니스트가 탄생했습니다. 지난달 19일(한국 시간) 세계적인 권위의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18세 한국인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그 주인공입니다. 임윤찬의 뛰어난 작품 해석력과 연주 기량은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기간 내내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준결선 무대에서 독주곡으로 최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완벽히 소화한 데 이어 결선 무대에서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통해 광기에 가까운 음악성과 기교를 선보였습니다. 연주 직후 청중으로부터 기립박수는 물론 "차원이 다르다"는 극찬이 쏟아졌습니다.

포트워스 심포니를 지휘한 올솝은 임윤찬의 피아노 연주에 감격해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이날 임윤찬은 청중상과 현대곡을 가장 잘 연주한 경연자에게 수상하는 비벌리 테일러 스미스 어워드까지 차지해 3관왕에 올랐죠. 18세 소년이 이뤄낸 성과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인데, 정작 본인은 아주 담담한 모습입니다. 임윤찬은 우승 직후 현지 기자회견에서 "(제 꿈은) 모든 것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 하고만 사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수입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고 있다)"며 "커리어에 대한 야망은 0.1%도 없다. 음악 앞에서는 모두가 학생으로 제가 어느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성숙한 수상 소감은 치열한 경쟁이 난무하고 순위를 올리는 데 혈안이 된 우리 사회에 신선한 바람처럼 느껴집니다. 어쩌면 임윤찬의 연주가 대중에게 거대한 감동으로 다가온 데에는 피아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배경이 된 건 아닐까요. 1등과 우승 트로피에 목매는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 임윤찬의 최고 무대로 불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조명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작품의 깊이를 알게 된다면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관객분들에게 전해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연주했을 뿐"이라고 말한 임윤찬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초인적인 연주 기량과 폭발적인 표현력, 장대한 구성 등으로 '악마의 협주곡'으로 불리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라흐마니노프, 미국 데뷔 위한 '대규모 걸작' 펼쳐내다
먼저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차이콥스키에 대적할 만한 위대한 음악가로 꼽힙니다. 유년 시절부터 피아노를 익혔던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 음악원 재학 중 작곡을 시작해 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892년 '피아노 전주곡 c#단조'를 초연하게 됩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작품을 계기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19세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날의 성공을 시샘하듯, 시련은 찾아왔습니다. 1897년 초연한 '교향곡 제1번'을 향해 평론가들의 악평이 들끓었던 것이 계기였습니다. 당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던 라흐마니노프는 신경 쇠약까지 앓게 됐는데 시간이 갈수록 병세가 악화돼 작곡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하죠. 역설적이게도 라흐마니노프의 삶에 드리웠던 가장 어두운 시기는 작곡가로서의 영광을 끌어오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암시 요법으로 건강을 회복한 라흐마니노프는 1901년 세기의 명작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세상에 선보이면서 재기에 성공합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작품으로 글린카상을 수상하는 영예까지 안게 되죠.

이후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 작품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제3번'입니다. 미국 데뷔 무대를 위해 작곡한 곡으로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4개의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규모가 거대하면서 특유의 개성이 100% 발휘된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작품을 동시대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호프만은 작품을 소화하기엔 손이 너무 작다는 게 이유로 단 한 번도 작품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극한의 연주 기법과 초인적인 표현력을 요구해 라흐마니노프 자신조차도 "코끼리를 위해 작곡했다"는 우스갯소리를 남겼다는 '피아노 협주곡 제3번'.

라흐마니노프가 표현하고자 한 음악을 완벽히 구현했다고 극찬받는 임윤찬의 우승 무대를 떠올리며 음악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피아니스트 표현력·연주 기량 최절정으로…극도의 긴장감 유발
작품은 바순과 클라리넷의 물결치듯 단순한 선율로 시작됩니다. 이내 피아노가 등장하면 아주 작은 소리로 러시아 민속적 색채가 뚜렷한 주제 선율이 등장합니다. 이후 악보에 제시된 Piu mosso(더 빠르게)를 계기로 분위기가 바뀌면서 앞으로 달려 나가는 듯한 피아노의 독주가 이어집니다. 피아노가 상행하는 아르페지오를 펼치면 그 위에 호른과 비올라의 주제 선율이 쌓이는데, 이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조화가 풍부한 화성과 다양한 리듬으로 구현되면서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표현력으로 극대화됩니다.

고음역과 저음역을 휘저으며 청중으로 하여금 혼란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피아노 선율은 점차 소리를 키우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그러면 이를 환기할 새도 없이 바로 첫 번째 피아노 카덴차가 등장합니다. 카덴차란 모든 반주가 사라지고 독주자 홀로 화려한 선율을 선보이는 부분입니다. 연주자의 기교를 마음껏 발현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죠.

넓은 음역의 아르페지오 음형을 반복하며 고음으로 달려간 피아노 선율은 순식간에 다시 저음으로 떨어지면서 급격한 분위기 전환을 이뤄냅니다. 이를 받아 오케스트라가 비교적 단순한 선율과 가벼운 스타카토 연주로 새로운 음악적 분위기를 형성하면 피아노가 우아하면서도 강렬한 선율을 연주하며 그 위에 올라섭니다. 그러면 다시금 피아노의 독주가 시작됩니다. 단조로운 선율 아래로 복잡한 화음을 펼치면서 찬란한 물빛이 반짝이는 듯한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이때 바순, 호른, 바이올린, 오보에, 클라리넷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두터우면서도 깊은 음색을 구현합니다.

이후 피아노가 홀로 주제 선율을 연주하는 구간에서는 포르티시모(ff)를 향해 선율의 진행 속도를 높이면서 순식간에 청중을 압도합니다. 스타카토 연주 이후 고음역을 향해 상행하면서 긴장감을 키웠다가 속도를 줄여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하던 피아노 선율은 또 순식간에 동형 진행으로 속도감을 키우면서 청중으로 하여금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도록 합니다.

그다음으로 오케스트라에서 첫 주제 선율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때는 부분적인 전조를 통해 장조와 단조 경계를 넘나들면서 조금 더 밝은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러다 오케스트라에서 테누토와 스타카토, 피아노에서 악센트 기법이 등장하면 두 영역이 점차 합을 이루며 포르티시모에 도달합니다. 이내 복잡한 리듬은 사라지고 선율이 1악장 중 가장 웅장한 크기의 포르티시시모(fff)까지 이르면서 긴장감이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이 지점이 전체 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부분 중 가장 빠른 구간으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강렬한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이때 피아노에서는 8마디 내내 오른손과 왼손이 엇갈리는 고난도의 화음 연타를 이어갑니다. 피아노의 소리가 줄어들면서 유사 캐논 진행으로 분위기를 한 번 더 바꾸면 이내 두 번째 카덴차가 등장합니다. 이번 콩쿠르에서 임윤찬이 연주한 '오리지널' 카덴차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여섯잇단음표 선율로 시작됩니다.

이내 화성이 점차 넓어지고 왼손과 오른손 사이 거리가 벌어지면서 선율 진행이 점차 격렬해집니다. 왼손의 셋잇단음표와 오른손의 악센트가 겹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면 무언가 쏟아지듯 아주 빠른 속도의 악상이 이어집니다. 이후 스타카토 기법의 등장으로 잠시 긴장을 완화하는 듯 보이던 선율은 순식간에 저음부와 고음부를 넘나드는 화음과 악센트 연타로 변형되면서 1악장 전체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구간에 진입합니다. 피아노 선율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른 속도로 소리를 줄이면 단선율 아르페지오로 분위기가 전환됩니다.

다음엔 평온한 호숫가를 상상케 하는 서정적인 선율이 등장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 선율이 다시 빠른 리듬으로 상행과 하행을 거듭하다 멈추면서 청중들이 듣기에는 불편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후 호른 선율을 계기로 첫 주제 선율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어 16분음표로 아주 높은 음에서부터 빠르게 떨어지는 피아노 선율이 속도를 줄였다가 점차 빨라지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면 아주 작은 소리로 줄어든 1악장은 순식간에 막을 내립니다

작품 내내 이뤄지는 대규모 구성의 진행과 끊임없는 악상 변화, 초인적인 연주 기법으로 청중으로 하여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성의 작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연주가 "신들린 듯 강렬하다"는 찬사를 받은 것은 경이로울 정도로 완벽히 구현해낸 기교와 극단적인 감정조차 풍부하게 발현한 표현력 같은 표면적인 이유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무한한 경쟁과 순위를 매기는 데 몰두된 사회에서 벗어나 오직 음악 자체의 존재 가치를 발현하는 데 집중한 그의 음악이 치열한 삶에 지쳐버린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진 것은 아닐까. 커리어에 대한 야망에는 관심도 없고,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며 살고 싶다는 소박하고도 순수한 바람을 밝힌 임윤찬이 10년 뒤에도 20년 후에도 변치 않는 모습으로 가장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음악만을 선사해주길 바랍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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