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한국보다 4년 앞선 2001년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을 도입했다. 저출산, 고령화로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만으로는 은퇴자의 노후를 책임질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퇴직연금 수익률이 올라오지 않자 2014년에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시행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 0~3%에 머물러 있다. 전문가들은 “디폴트옵션으로 원금보장형 상품을 택할 수 있도록 한 게 화근이었다”고 말했다. 투자에 소극적인 일본 국민들은 디폴트옵션의 70% 이상을 원금보장형으로 선택했다.
저출산, 고령화가 심각해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보험료를 낼 청년층은 줄어들고 받을 노년층은 늘자 정부는 2001년 ‘DC형 연금법’을 제정했다. 정부의 책임을 일정 부분 기업과 개인에게 지운 셈이다.
문제는 일본인들이 투자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운용 수익률을 올려 소득대체율을 높이기 위해 DC형 연금을 도입했음에도 일본인들은 연금 자산의 대부분을 원금보장형 상품에 묶어뒀다. 오타니 겐타로 JP모간 애셋매니지먼트 일본법인 기관영업 전무는 “버블경제 붕괴 당시 자사주를 갖고 있던 직원들은 주가가 10분의 1 토막 나는 경험을 했다”며 “이후 리먼 쇼크 등을 거치면서 ‘주식은 위험한 것, 올라도 한때’라는 인식이 퍼졌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수익률 향상을 위해 2014년 디폴트옵션을 도입했다. 다만 후생노동성이 가이드라인을 통해 ‘가입자 등으로부터 운용 지시가 없을 때 디폴트옵션을 도입할 수 있다’고 제시한 게 전부였다. 얼마나 오래 운용 지시가 없을 때 디폴트옵션으로 전환하는지 등의 내용이 없어 대부분 기업이 이 제도를 활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금 손실을 우려하는 국민 정서를 반영해 원금보장형을 디폴트옵션 상품 대상에 포함했다. 미국의 경우 원금 손실이 나도 사용자(디폴트옵션 도입 기업)는 책임이 없다는 면책 조항이 있지만 일본은 없다.
그 결과 디폴트옵션 도입 기업 중 95%가 원금보장형 상품을 포트폴리오에 포함시켰다. 일본의 퇴직연금 수익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연 0~3%에 머무는 이유다.
다만 시간이 지나며 디폴트옵션 설정률이 높아지고 원금보장형 선택 비중은 차츰 감소하는 추세다. 일본 기업연금연합회에 따르면 2017년 30.9%에 불과하던 DC형 퇴직연금 내 디폴트옵션 비중은 2020년 40.5%로 증가했다.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원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하는 비율은 제도 도입 초기 반짝 증가(2017년 70.7%→2018년 76.3%)했다가 2020년 75.5%로 줄어들었다.
20대는 개인형 퇴직연금 내 예금 상품 비중이 21.2%로 가장 낮았고, 30대(21.9%)가 뒤를 이었다. 40대(26.8%)와 50대(34.6%)는 예금 비중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사가와 아구리 다이와소켄 연구원은 “공적연금이 붕괴되고 있다는 식의 보도가 자주 나오면서 젊은 세대 사이에서 공적연금에 대한 불안이 높아진 것 같다”며 “자신의 노후자금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2030세대를 중심으로 개인형 퇴직연금에 가입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쿄=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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