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반도체 인재와 시카고플랜

입력 2022-07-06 17:30   수정 2022-07-07 00:03

국가가 산업 분야별 중·장기 인력수급계획을 잘 수립하고 교육시스템을 적절하게 정비해 산업계에 필요한 인재를 교육계에서 배출하도록 산업과 교육을 연계해주는 일은 국가의 교육에 대한 책무다. 국가가 이 일을 제대로 못 할 경우 청년 실업은 증가하고 기업은 필요한 인재가 부족해진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각축전 속에서 한국은 반도체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각계각층에서는 반도체 인재 육성을 위한 다양한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안하고 있다. 그런데 정확히 20여 년 전에도 우리는 세계적인 ‘기술 전쟁 시대’를 맞아 과학기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며 기업과 대학 간 인력 수급이 맞지 않는다는 문제를 제기했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첨단산업 분야의 인력 부족 문제는 악화됐고 낮은 출생률까지 고려하면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20년 뒤에도 같은 문제로 고민하지 않으려면 좀 더 심도 있는 논의와 준비가 필요하다. 산업계에 필요한 미래 인재의 ‘양적 성장’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질적 성장’과 이를 성취하기 위한 ‘교육 내용’이 핵심이다. 반도체를 예로 들면, 반도체학과 정원을 늘리고 관련 학과를 증설하는 등 양적 확장만으로는 부족하다. 질적으로 수준 높은 반도체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어떤 교육’을 제공할 것인가가 성공의 필수요건이다.

미국의 법철학자 로버트 허친스는 1929년 30세 젊은 나이로 시카고대 5대 총장이 됐다. 허친스 총장은 미국의 직업교육을 비판하며 ‘시카고플랜’ 프로젝트를 관철시켰다. 시카고플랜은 전교생에게 2년 동안 적용되는데 입학 후 졸업까지 학교에서 지정한 100여 권의 철학, 정치학, 인류학, 경제학, 문학 관련 고전을 읽지 않으면 졸업시키지 않는다는 일종의 고전철학 독서 프로그램이다. 당시 시카고대는 진보주의 선구자인 존 듀이가 실험학교 듀이스쿨을 세워 진보주의 교육의 시발점이 된 학교이니 대학 내 반대가 매우 심했다. 하지만 이 시카고플랜은 평범했던 시카고대를 100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최상위권 명문사립대학으로 발전시킨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도 시카고대는 시카고플랜의 전통을 계승해 학부 2년간 폭넓은 교양과목을 강조하는 리버럴 아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교양과목을 통해 다양하게 사고하는 방식을 배우고 창의적인 사고를 증진하는 한편 이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협소한 기술 분야 습득에 그치기보다는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기존 관행에 대한 도전의식 등을 기를 수 있는 교양과목 교육을 중시하는 것이다.

특정 부문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단기적 성과를 가져오지만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은 장기적인 투자다. 인문학적 소양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갖게 한다. 예측 불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게 해주고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해 준다. 기존의 것을 관점을 달리해서 보게 해주고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안목을 갖게 해준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과학기술자는 최고 인재가 될 수 없다.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이제는 학문영역의 장벽을 허물어 수준 높은 통합형, 융합형 인재를 키워내는 질적 성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향후 저출산 문제가 더욱 심화한다는 가정하에 인재의 양적 확대보다는 질적 성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우리 교육시스템이 반도체 기술자가 아니라 반도체 리더를 배출해 낼 수 있을지 이제 막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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