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계 씀씀이가 줄면서 기업들 재고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주요 대기업의 재고가 사상 최대인 150조원에 육박한 상황이다. 불어난 재고를 밀어내기 위해 가격을 내리면 실적이 떨어지고 중장기적으론 투자와 고용에도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6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제조업 재고율(재고/출하)은 114.5%로 집계됐다. 역대 5월 기준으로 코로나19를 겪던 2020년 5월(127.5%)과 외환위기 때인 1998년 5월(137.6%) 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재고율은 기업의 제품 재고를 시장에 내다 판 제품의 양으로 나눈 값이다. 팔리지 않고 쌓인 ‘악성 재고’가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준다.
소비재를 판매하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재고 지표가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삼성전자(47조5907억원), 현대자동차(12조2943억원), LG전자(10조2143억원), SK하이닉스(10조3927억원), 기아(7조7517억원) 등의 재고 물량만 88조2437억원어치(올 3월 말 기준)에 이른다. 작년 말보다 재고 자산이 9조4553억원 늘었다.
문제는 재고가 소비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인플레이션을 감당하기 힘든 소비자들이 앞다퉈 ‘지갑’을 닫고 있어서다. 올 5월 소매판매액지수는 119.6(2015년 100 기준)으로 전달에 비해 0.1% 하락했다. 벌써 석 달째 ‘마이너스’ 행진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비싼 가격표를 보고 놀란 소비자가 소비를 줄이는 이른바 ‘스티커 쇼크’가 현실화했다고 분석했다. 실질 구매력이 훼손된 가계가 먹고 마시는 필수재에만 돈을 쓰고, TV 등 값비싼 제품에 쓰는 돈은 줄인 것이다.
시장에서는 제조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재고 물량을 털어내는 과정에서 실적이 훼손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재고 처리를 위해 가격을 할인하면 수익성이 악화하기 때문이다. 경쟁사의 할인 가격에 맞춰 울며 겨자 먹기로 제품 가격을 내려야 하는 사례도 생긴다. 한 가전업체 최고위 임원은 “점유율이 밀리지 않으려면 손해를 감수하고 가격을 내려 판매할 수밖에 없다”며 “원자재 가격 인상과 물류난까지 겹친 탓에 실적 방어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투자와 고용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미 생산한 물건도 창고에 쌓이는 상황에서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거나 신규 인력 충원에 나설 수 있겠냐는 지적이다. ‘재고 증가→투자·생산·고용 감소→씀씀이 감소→재고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됐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통계청에 따르면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5월 75.7%로 전달보다 1%포인트 하락했다. 1월(78.6%) 후 하락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투자 심리도 위축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매출 500대 기업 중 1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28%가 올 하반기 투자 규모를 축소하겠다고 했다. 투자 규모를 확대한다는 응답(16%)보다 12%포인트 높았다. 한국은행도 5월 발표한 경제전망보고서에서 올해 설비투자 증가율 전망치를 종전 2.2%에서 -1.5%로 낮춰 잡았다.
김익환/박신영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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