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 본토 내 반도체 생산 역량 강화를 위해 야심차게 추진한 반도체 지원법(Chips Act)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파격적 세제 혜택과 인센티브 등 미 정부의 전폭 지원을 믿고 현지에 투자한 반도체 기업들은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이다. 수십조원 단위 금액을 쏟아부어 대규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인 삼성전자와 TSMC, 인텔의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시아에 편중된 반도체 생산 역량을 미국으로 다시 끌어오겠다는 포부로 지난해 1월 취임할 때부터 반도체 지원법 통과를 위해 강력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후 반도체 지원법은 상원에서 지난해 6월, 하원에서 올해 2월 각각 처리됐지만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립하면서 "이러다 법안 통과가 막히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퍼지는 분위기다.
미국 경제전문 매체 블룸버그는 지난 5일 "반도체 기업들과 미국 의회는 520억 달러가 걸린 멍청한 '치킨게임'을 하고 있다"며 "양측 모두 자신들이 추진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이 매체는 상하원 모두 미국 반도체 산업 부흥을 '정치적 인질'로 삼고 있어 의회에서 법안 통과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상원과 하원에서 각각 내놓은 수정안에 반도체 투자 지원 내용뿐 아니라 이민정책 개편과 법인세 감면, 연구개발(R&D) 지원 등 양 정당이 첨예하게 대립 중인 내용이 패키지로 묶여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경제방송 CNBC에 출연해 인텔의 오하이오주 공장 건설 지연을 언급하며 "옹졸한 당파심 때문에 의회에서 머뭇거리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인텔은 법안 지연을 이유로 오하이오주에 200억달러(약 26조원)를 들여 반도체 공장 2곳을 건설하는 계획을 미룰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그는 "우리는 TSMC나 삼성전자가 아닌 대만·일본·한국과 경쟁하고 있다"며 "우리가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중국 등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법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유럽에서 생산을 늘릴 계획"이라면서 "8월 전에 통과해달라"고 호소했다.
러몬도 장관은 "글로벌웨이퍼스 CEO가 해당 투자는 법안 통과에 달려있다고 말했다"면서 "8월 휴회 전에 통과가 돼야 한다. 의회가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이 계약은 날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글로벌웨이퍼스의 텍사스 공장 건설은 법안 통과에 달려있다고 했다.
이 기업의 마크 잉글랜드 사장은 반도체 지원법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한국 쪽으로 투자를 돌리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글로벌웨이퍼스는 세계 제3위 실리콘 웨이퍼 생산업체로서 미국 공장이 들어서면 이를 통해 미국 내 인텔과 TSMC 등의 공장에 실리콘 웨이퍼가 안정적으로 공급돼 미국에서 첨단 반도체 생산이 늘어날 수 있다. 그 밖에 미국 파운드리 기업 글로벌파운드리스도 법안 통과 지연에 따라 뉴욕에 진행하기로 한 투자 속도가 미뤄지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대만에서도 장관급 각료인 국가발전위원회 궁밍신 주임 위원이 지난달 28일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법안 처리를 촉구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 TSMC 임원이기도 한 궁 위원은 TSMC가 2020년 120억달러(약 15조7000억원)를 들여 미 애리조나에 공장을 짓기로 한 계획을 언급하며 "이미 착공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법안 통과에 대한) 신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장 건설 속도는 미국 측 보조금에 달려있다고 압박했다.
산제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CEO는 지난 2월 미국 상원 상무위원회에 출석해 "현재 메모리반도체 2%만을 미국에서 생산한다"며 "미국에 공장을 지으려면 반도체 지원법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팀 아처 램리서치 CEO 역시 "반도체 지원 법안의 보조금, 세액 공제 등이 절실한 상황이기 때문에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만약 8월 초 의회 휴회 때까지 통과가 안되면 11월 중간선거 등으로 인해 처리가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11월 미국 중간선거가 진행되면 의회 구성원들이 바뀌는 만큼 법안 도입과 통과, 협의 절차를 모두 처음부터 진행해야 해서다.
삼성전자가 미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도 불투명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 사장이 인텔 CEO, TSMC CEO, 미국 대형 정보기술(IT) 기업 CEO들과 함께 의회에 반도체 지원법 통과를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항의 의사표시를 한 상태. 삼성전자 관계자는 "인내심을 갖고 법안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새 반도체 파운드리공장 부지를 선정하고 170억달러(약 22조원)에 이르는 대대적인 투자를 예고했다. 이후 공장 건설을 위해 시공사를 선정하는 등 절차가 진행됐지만 착공식은 미뤄지고 있다.
광주 출신의 양 의원은 삼성전자에 고졸 여직원으로 입사해 상무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앞으로 반도체 산업 관련 규제 개혁과 인재 양성, 세제 지원 방안을 집중 논의할 계획이다.
양 위원장은 지난달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반도체특위 1차 회의에서 "오늘 출범하는 반도체특위의 키워드를 '초월'이라 말씀드리고 싶다. 이 자리는 정당을 초월하고, 기업을 초월하고, 세대를 초월하고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라며 "정파와 이념을 초월한 여야 협치의 새로운 모델이 되겠다"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늦어도 이달 안에는 돌파구가 마련돼야 후속 투자 및 착공 등을 할 수가 있다"며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만약 이 법안이 계속 밀리거나 혹은 폐기된다면 미국의 파운드리 경쟁력은 더 약화될 것이고, 미국 내 투자에 대한 신뢰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고 말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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