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의 한 제조업체 총무부 직원 A씨는 2012년 개인적으로 쓴 4500원을 업무비로 처리하면서 ‘횡령의 맛’을 들였다. ‘바늘 도둑’은 얼마 안 가 ‘소도둑’으로 컸다. A씨는 2018년까지 7년간 회삿돈 7억3000만원을 빼돌려 외제차 구입, 해외여행, 주식 투자 등으로 탕진했다. 결국 그는 작년 8월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A씨처럼 횡령은 장기간 여러 차례에 걸쳐 이뤄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소액을 빼내 쓰고 적발되지 않으면 다음 범행으로 이어지고, 금액도 점차 커진다. 하지만 적발됐을 경우 처벌은 ‘관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조계에선 “변제를 상당 부분 했거나, 초범이면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14명은 부동산·주식·암호화폐 등에 투자하기 위해 횡령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투자 목적은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판결문에 ‘개인적 목적으로 소비’라고 적혀 있는 경우에도 투자 목적으로 횡령금을 사용한 케이스가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투자에 실패해 원금을 복구하지 못하면 더 큰 돈을 빼내다 꼬리가 밟히고, 아예 잠적해버리기도 한다”며 “주식시장이 나쁘면 횡령 신고가 평소보다 많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경제범죄에서 피해변제 여부가 중요 양형 요소기 때문에 변제 시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경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법조계 일각에선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에서 연방검사를 지낸 이숭헌 미국법 자문사는 “미국에선 횡령을 대단히 무거운 죄로 보기 때문에 변제했다고 공식처럼 집행유예를 주진 않는다”며 “배상명령과 함께 벌금형까지 추가로 얹는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설명했다.
65.9%의 피고인은 주식, 코인 투자나 도박, 사치품 소비 등으로 횡령한 돈을 날려 변제도 불가능했다. 이 경우 대부분 실형을 선고받긴 했지만, 기간은 길지 않았다. 실형 판결이 난 피고인(56명) 가운데 82.1%(46명)는 4년 이하의 징역이 선고됐다. 4년 이상 징역형은 10건에 불과했다. 엄벌주의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윤정근 율촌 변호사는 “기업경영을 하다가 불가피하게 횡령으로 처벌받는 사례도 있다”며 “모든 횡령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엄벌하기보단 개별적 사안에 맞춘 유형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재판부가 금액에 따라 구간 내에서 최종 형량을 결정하지만, 이 역시 기준이 천차만별이다. 앞서 7억3000만원을 횡령한 총무부 직원 A씨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똑같이 징역 4년을 선고받은 B씨는 38억원을 횡령했다. B씨 역시 대부분의 금액을 써버려 변제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절대적인 횡령 금액보다 피해 회사의 규모에 따른 피해 정도 등을 고려해 내린 양형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범죄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일 때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을 적용해 무기징역까지 선고가 가능하지만, 실무적으로는 양형기준 내 형량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게 일반적이다.
양형기준이 낡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권고 형량 기준이 2009년 시행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창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양형 기준이 마련된 당시와 지금은 물가와 경제 규모가 달라졌다”며 “2000억원대 횡령도 생기는 만큼 횡령 금액 유형을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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