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총격으로 사망한 지 이틀 만에 치러진 일본 의회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자민당이 대승을 거뒀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정권의 높은 지지율에 힘입어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던 상황에서 아베 전 총리의 사망으로 동정표까지 몰렸다는 분석이다.
11일 오전 5시35분 현재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여당은 125명을 뽑는 전날 참의원 선거에서 76석을 얻었다. 자민당은 63석을 확보해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획득했다. 개표가 끝나지 않은 의석은 1석이다.
임기가 6년인 참의원은 전체 의석이 248석이다. 3년마다 의석의 절반을 새로 선출한다. 3년 임기가 남은 참의원 의석은 자민당이 56석, 공명당이 14석 갖고 있다.
자민당 등 헌법 개정에 찬성하는 4개 당은 93석을 추가해 개헌에 필요한 의석(82석)도 확보했다. 임기가 3년 남아 이번에 선거를 실시하지 않은 의석(84석)을 포함하면 177석으로 전체의 3분의 2(166석)를 11석 넘겼다.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하면 자위대의 헌법 명기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헌을 추진할 수 있다.
중의원에서는 자민당 등 개헌 세력이 작년 10월 총선에서 압승해 3분의 2 이상 의석을 확보했다.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도 대승을 거둠에 따라 기시다 총리는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앞으로 3년 동안은 큰 선거가 없어 안정적인 국정 운영의 기반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기시다 내각은 60~70%의 높은 지지율을 꾸준히 유지했다. 그런데도 일본 정계가 기시다의 장기 집권을 쉽사리 전망하지 못한 이유는 취약한 당내 지지 기반 때문이었다.
그가 이끄는 ‘기시다파’는 자민당 내 네 번째 파벌이다. 소속 의원은 약 45명으로 자민당 전체 의원(262명)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아베 전 총리가 회장인 최대 계파 ‘아베파’(소속 의원 약 95명)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아베 전 총리가 다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른 후보를 밀면 총리가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자민당 최대 파벌을 이끌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사망으로 정권 역학관계가 급변해 정치·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아베 전 총리는 2020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정책에 관여해 왔다. 국가 부채 증가를 걱정하지 말고 보다 적극적인 금융완화·재정확장 정책을 위해 국채 대량 발행을 주문했다. 일본의 핵 보유와 군비 확대를 주장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아베의 영향력을 의식해 일본 정부 부처 관료들은 총리 퇴임 이후에도 그의 사무실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기시다 총리가 자신의 간판 정책인 ‘새로운 자본주의’ 방향을 대폭 수정한 데서도 아베 전 총리의 여전한 영향력이 입증된다. 지난달 1일 일본 정부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담은 경제재정 운용과 개혁의 기본 방침(호네후토 방침)을 발표했다.
정부의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시다 총리는 경제재정 기본방침에 ‘국가의 재정수지를 5년 이내에 흑자로 전환하겠다’고 시기를 명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재정적자를 감수해야 한다는 아베의 입김에 밀려 ‘5년’이라는 시기를 막판에 삭제했다. 반대로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까지 늘린다’는 대목에는 당초에 없던 ‘5년 이내’라는 시기를 집어넣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베의 사망으로 그가 사실상 결정권을 쥐고 있던 당내 역학구도는 바뀌게 됐다. 아베파에는 소속 의원 다수의 지지를 받는 후계자가 없다. 1985년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당시 자민당 최대 파벌이었던 ‘다나카파’도 후계자 부재로 분열한 전례가 있다. 강경 우파인 아베파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온건파인 기시다 총리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아베 정권의 정책을 거의 그대로 계승해온 일본의 중장기 정책 축이 바뀔 가능성도 있다. 헌법 개정이나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와 같은 우경화 정책이 다소 완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레 나온다. 아베 전 총리는 개헌론의 대표주자였다.
10여년간 이어진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도 일부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피습당해 위독하다는 속보가 전해진 지난 8일 오전 11시30분께 도쿄 금융시장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1.5% 이상 오르던 닛케이225지수는 급격히 상승세가 꺾이며 강보합세로 거래를 마쳤다.
반면 달러당 136엔대에서 움직이던 엔화 가치는 135.30엔까지 올랐다. 우에노 야스나리 미즈호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아베 전 총리는 엔저(低)와 주가 상승을 이끈 인물”이라며 “(그의 사망으로) 아베노믹스가 끝날 것을 예상한 금융시장이 엔고(高)와 주가 하락으로 움직였다”고 분석했다.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아베 전 총리 사망에 대한 시장의 민감한 반응을 일본 금융정책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아베가 일본 시장에서 갖는 존재감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일본 경제는 아베노믹스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금융완화·재정확장 정책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경제의 기초체력(펀더멘털)을 약화시켰다는 지적이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256%로 주요 7개국(G7) 가운데 가장 높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취임 직전인 2013년 3월 말 13%였던 일본은행의 국채 보유 비율은 지난달 말 50%를 넘었다. 24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엔화 가치는 수입물가를 상승시켜 중소기업과 서민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다.
그런데도 구로다 총재는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착실하게 계속한다”는 견해를 반복하고 있다. 국가 부채를 걱정할 필요 없이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아베 전 총리와 같은 입장이다.
아베 전 총리의 사망은 내년 4월 임기가 끝나는 구로다 총재의 후임 인선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분석했다. 자민당 최대 파벌 ‘아베파’에는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정적자를 감수하고라도 대규모 금융완화를 지속해야 한다는 의원이 많다.
반면 기시다 총리는 정부의 재정 적자를 줄여야 한다는 건전재정파다. 기시다 총리의 영향력이 강해지면 금융완화 정책을 일부 수정하자는 일본은행 총재가 탄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일본의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이 수정되면 엔화 약세가 멈추고 주식시장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했다.
한·일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기시다 총리는 외무상 시절인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주도했다. 도쿄 외교 소식통은 “지난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지키지 않은 데 대해 기시다 총리가 얼마나 반감을 갖고 있느냐가 관계 개선의 변수”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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