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 !

입력 2022-07-12 17:10   수정 2022-07-13 00:15


낯선 곳으로 떠나라! 이것은 여행 회사들이 내거는 슬로건이다. 일상의 반복과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 낯선 곳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 여행이다. 낯선 곳은 먼 곳이고,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삶이 있는 곳이다. 더 멀리 떠날수록 여행의 흥분과 기쁨은 커진다.

우리는 왜 낯선 곳을 동경하는가? 인류의 조상들은 끊임없이 살 곳을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했다. 그 본성에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게 여행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낯익은 곳을 떠나 낯선 장소에서의 다른 삶을 꿈꾼다. 낯선 장소에서 잠을 깨고 낯선 풍경을 마주하며 지칠 때까지 걸어보고, 이색적인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한다.
위기의 경험을 돈 주고 사는 것
국제공항, 기차역, 시외버스 터미널, 항구마다 여행객으로 북적거린다. 해마다 5억 명 이상의 인류가 자기 사는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여행은 쇄빙선이 얼음장을 깨고 전진하듯이 고정된 현재를 깨고 나아가는 일이다. 여행자는 불가피하게 ‘사이’의 존재다. 출발지와 도착지 그 사이 어디쯤에 머문다.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여행이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행은 한 장소에 정주하는 이들이 반드시 출발지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집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출가, 은둔, 잠적, 방랑이다. 이것들은 여행과 다르다.

여행은 편안함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모험과 위기에 뛰어드는 일이다. 여행은 돌발사고, 물건이나 여권 따위의 분실, 시행착오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우리 앞에 어떤 현실이 펼쳐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뇌에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 분비가 동시에 증가한다. 우리는 흥분하고, 걱정한다. 설레면서도 초조해한다. 우리는 과연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까? 그래서 여행자에겐 늘 긴장과 설렘이 교차한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위기의 경험을 돈 주고 사는 것이다.

여행은 내면 에너지의 흐름을 바꾸고, 우리를 여행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은 내가 겪은 이야기다. 20대를 막 넘긴 어느 해 부산으로 여행을 갔다. 부산은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먼 곳이었다. 그해 ‘한국해기사협회’의 ‘제1회 해양문학상’ 공모에서 내 시 ‘바다의 부활수업’이 당선돼 시상식 참석 겸 여행 계획을 잡은 것이다. 그 여행에 17세 소년인 친구 동생이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키가 큰 그 친구를 나는 혼자서 프랑스의 조숙한 천재 시인 ‘랭보’라고 불렀다. 랭보는 집에서 훔쳐 온 ‘조니워커’ 한 병을 품에 안고 부산 여행에 동참했다.

우리는 시상식이 끝난 뒤 며칠 묵으며 부산 을숙도 갈대밭 등지를 다녀올 작정이었다. 나는 을숙도 갈대밭 풍경을 그리려고 캔버스와 유화물감을 챙겨갔다. 설레며 기차를 타고 떠난 우리의 ‘낭만여행’은 참담하게 끝났다. 랭보가 품에 안고 다니던 양주는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나고(이때는 술도 못 마시던 시절이다), 우리가 묵은 여관방은 불결하고 주인은 불친절했다. 을숙도 갈대밭은 황량했고, 분뇨 냄새가 났다. 유화물감은 더디 마르고, 그 탓에 물감이 옷과 소지품에 묻어났다. 우리는 2박 3일 만에 지치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울에 올라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사를 했고, 그 친구와도 멀어졌다. 10년쯤 지난 어느 날, 신문을 펼쳐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한 미술대전의 대상작이 발표됐는데, 그 주인공 이름을 보니 랭보였다. 그는 나와 부산 여행을 다녀온 뒤 미술대학에 진학했고, 화가로 변신해 있었다. 단 한 번도 그림을 좋아하거나 그려본 적 없는 그가 화가가 되었다니! 신문 한 면이 온통 그의 작품과 인터뷰로 도배돼 있었다.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곳에서
이렇듯 여행은 우리의 내면 형질을 바꾸고, 뜻밖의 운명으로 데려가기도 하는 법이다. 여행이 쓰디쓴 실패, 무참한 낙담을 안겼을 때도 여행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여행자란 단지 이동하는 사람이고, 그가 여행에서 행복의 충만, 사치와 고요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여행에서 거머쥐려는 것들에 대해 시인은 노래한다. “거기선 일체가 질서와 아름다움, /사치, 고요와 그리고 쾌락뿐”(보들레르, ‘여행으로의 초대’). 모든 여행이 다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는 여행에서 최대치의 행복을, 최대치의 즐거움을 꿈꾼다.

여행자는 낯선 시선으로 낯선 풍경을 바라본다. 여행자에게 풍경은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백일몽이거나 판타지일 것이다. 안 보이던 풍경의 질서를 본다는 점에서 여행자는 풍경의 발견자다. 당신은 이국의 도시에 있는, 가끔 엘리베이터가 쉭 하고 오르내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조용한 호텔 방에 있다가 돌연 어떤 풀리지 않는 생각의 실마리가 풀려나와 소리를 지른 적은 없는가?

여행자의 내면에 잠든 꿈과 백일몽들이 갑자기 깨어나는 찰나가 있다. 여행자의 뇌는 창의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고, 번득이는 아이디어들이 반짝인다. 알랭 드 보통은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며 “여행은 생각의 산파”(‘여행의 기술’)라고 결론을 내린다.
소비가 아니라 가장 값진 투자
여행자는 누구나 주변인이고 이방인이다. 여행자는 지도를 들여다보고 방향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여행자는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는 자다. 오, 누가 당신을 여행자로 만들었는가? 아무도 아니다. 당신을 여행자로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다른 삶을 꿈꾸고, 다른 곳을 사유하기 위해 스스로 떠나온 자다. 당신은 법, 권위, 관습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려 한다. 평소 누리지 못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다. 당신의 일탈 욕구는 이국의 환경 속에서 폭발한다.

떠나라, 더 늦기 전에. 여행이 주는 것은 어쩌면 아주 작은 기쁨이나 위로, 아름다움의 덧없음 따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 일상에 매몰된 감각을 쇄신하고, 인식의 눈부신 전환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야망과 피로를 벗어던지고 다르게 생각하기 위하여.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삶은 열리지 않는다. 여행에서 당신의 잠든 영감을 깨워라. 여행은 결코 무의미한 소비가 아니다. 여행은 삶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자기 자신을 위한 값진 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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