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식당 주인 김모씨(40)는 손님이 삼겹살을 주문하면 함께 제공하던 상추를 최근 식탁에서 없앴다. 메뉴판에는 ‘개별적으로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상추를 제공하겠다’고 적었다. 함께 주던 당근, 풋고추 등은 청양고추로 대체했다. 청양고추는 매운맛이 강해 손님들이 많은 양을 먹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다.
김씨의 이런 조치는 물가 상승에 따른 고육지책이다. 김씨는 “올초까지 한 박스(4㎏)에 2만원 안팎이던 상추값이 10만원을 넘어섰다”며 “손님들이 추가로 채소나 반찬을 요청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라고 토로했다. 그는 “따로 상추를 여러 번 달라는 고객에게는 차마 못 준다고 말할 수 없어 ‘재고가 다 떨어졌다’고 얼버무리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최악의 가뭄에 폭염·장마가 이어지면서 채소값이 급등세다. 이에 따라 자영업자들은 ‘쌈채류 구조조정’에 나섰다. 이른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이다.
팜에어·한경 농산물가격지수(KAPI)를 산출하는 가격 예측 시스템 테란에 따르면 12일 기준 상추의 ㎏당 도매가격은 전년 7월 평균 대비 83.8% 올랐다. 배추(139.2%), 부추(127.5%), 오이(91.3%), 당근(89.9%), 깻잎(82.8%) 가격 상승폭도 컸다.
소매가도 비슷한 흐름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운영하는 농산물유통정보(KAMIS) 시스템에 따르면 적상추 소매가격은 12일 기준 100g당 2174원, 청상추는 2250원이다. 각각 866원, 851원이던 평년 수준에 비하면 1.5~2.5배 비싸다.
깻잎도 100g당 2443원으로 평년(1578원) 대비 50%가량 올랐다. 양배추, 시금치, 얼갈이배추, 가시오이, 열무, 양파, 미나리, 파프리카 등 거의 모든 채소값이 고공행진 중이다.
메뉴 가격을 올리면 손님들 발길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영업자들은 공짜로 나가는 반찬을 줄이는 방식을 택했다. 서울 성수동에서 샐러드 전문점을 운영하는 장모씨(33)는 “하필 채소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식당을 해서 매출 타격이 크다”며 “그렇다고 동네 단골들을 놓칠 수는 없어 가격을 올리기보다는 음식량을 줄였다”고 설명했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족발집을 운영하는 윤모씨(35)도 “상추 소비가 대량으로 이뤄지는 식당과 가정의 사정은 다르다”며 “손님들에게 상추값이 많이 올랐다고 일일이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 요구하면 내주고 있는데, 몇 번 제공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문제는 장마철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채소 가격이 안정화되긴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다. 장마가 길어지는 데다 올여름 폭염까지 예고돼 농산물 공급난이 벌어질 공산이 커지고 있다.
폭염이 계속된 2018년에도 잎채소와 과일이 화상이나 병충해 피해를 봐 가격이 크게 오른 적이 있다. 작황 부진은 수확량 감소로 이어지는 만큼 추석 전까지 채소값이 안정되긴 어려울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손님들도 메뉴 양과 반찬 가짓수가 줄어들었다는 점을 체감하고 있다. 배달 음식점도 메뉴에 ‘채소 추가’ 항목이 생겨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곳이 늘었다. 취업준비생 박모씨(24)는 “최근 집 근처에서 냉면을 포장했는데, 평소 제공하던 단무지가 사라졌다”며 “따로 비용을 내지 않으면 반찬을 안 주고 나무젓가락도 요청할 때만 준다”고 했다. 박씨는 “식당들이 비용을 줄이려고 하는 걸 체감했다”고 덧붙였다.
■ 슈링크플레이션
슈링크(shrink·줄이다)와 인플레이션(inflation·물가 상승)의 합성어다. 물가 상승에 음식값을 올리는 대신 손님에게 내놓는 반찬 구성 등을 줄이거나 저렴한 품목으로 바꾸는 것을 가리킨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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