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20여 번의 해전에서 무패했고, 아군은 100여 명의 전사자만 낸 이순신 장군이 전사 직전 한 말이다.
육지전에서 끊임없이 패하던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5월 초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인 거제도의 옥포 대첩이 있었다. 같은 해 5월 말에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한 사천 전투에서 적의 배 79척을 침몰시키고 이순신 장군은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8월 14일에는 한산도 대첩이 있었고, 9월 1일에는 부산포 등 남해 동부 해안을 급습해서 대승했다. 이어 1593년과 1594년 계속 승리를 이어나갔다. 1597년에는 감옥에서 나와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고, 9월 16일에는 명량에서 13척으로 133척과 싸워 대승했다. 이후 몇 번 더 승리했고, 1598년 11월 19일에는 7년 전쟁의 마지막인 노량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전사했다.
패전 국면이라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 더구나 대규모 해양전에서 어떻게 이 같은 무패의 대승을 이룰 수 있었을까.
이순신 장군의 승전들은 동아시아 질서와 한민족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선 전쟁의 향방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첫 전투인 옥포 해전에서 승리한 5월 7일 한양은 이미 점령당했고, 탈출한 선조는 평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승전보로 백성들과 왕조는 절망에서 희망을, 패배에서 승리를 기약할 수 있었다. 한산도 대첩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은 수군은 물론 육군과의 협동 작전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곡창인 호남은 보호됐고, 일본군은 군량미 보급 등의 차질로 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아울러 의병 활동이 본격화됐다. 부산포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첫 상륙지이자 교두보를 공격해 100여 척을 침몰시켰다. 본국에서 병력 충원과 보급품 지원에 차질이 생긴 일본군은 전쟁 방식을 전환하고, 전쟁은 교착 상태로 변했다.
정유재란을 일으켜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전멸시킨 일본은 명량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 결과 일본 주도의 전쟁 국면은 전도됐고, 조선에는 승전의 분위기가 확산했다. 드디어 일본군이 총퇴각하는 과정에서 노량 전투가 벌어졌다. 북방에서 여진족의 발흥을 목도하고 전투를 벌였으며, 명나라와 일본의 관계뿐만 아니라 내부 사정도 간파한 이순신 장군은 나라의 미래 등을 고려해 명나라 수군과 달리 적극적으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해전의 대승리들은 국내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정부는 패망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무능하고 실추됐던 권위를 회복했다. 따라서 총력전을 펼쳤고, 의병을 활용했으며, 결과적으로 왕조를 연장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생존이 보존되고,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593년의 한 기록에 따르면 백성들이 떠돌다가 굶어 죽어 송장이 많았고,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국제적으로 일본군은 전력에 대손실을 입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이 좌절됐다.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고 점점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여진족은 조선 구원의 의사를 전달했다. 전쟁 구도에 변화가 생기고 본격적으로 해양전이 벌어졌다.
많은 군사 전문가도 믿기 힘들어하는 이순신 장군의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는 관리로서 능력이 출중할 뿐 아니라 아픈 상황에서도 휴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성실했다. 원칙에 충실하고 청렴했으나 모함을 받고 좌천과 투옥·장형·백의종군(2차)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군량미가 부족하고 전염병이 돌아 탈영병이 생기고, 백성들이 아사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였다. 그는 남해안의 몇 곳에 둔전을 설치하고, 어업을 장려했으며, 제염까지 했다. 자칫하면 국법에 어긋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군기를 엄정히 했지만 부하들을 아꼈다. 공을 상세히 보고해 상을 받게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공도 돌렸다. 이런 인품 때문에 전장에서는 부하들이 잘 따랐고, 백의종군할 때와 전사했을 때는 병사들과 많은 백성이 슬퍼했고, 유해를 고향으로 모실 때는 길가에서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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