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뉴욕 르네상스 만들어낸 '뉴욕 밖 주민들'

입력 2022-07-15 17:52   수정 2022-07-15 23:51


1995년 개봉한 영화 ‘스모크’의 중심 배경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담뱃가게다. 흔하고 만만한 동네 구멍가게다. 이곳 단골인 소설가 폴은 임신한 아내를 강도사건으로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산다. 어느 날 저녁, 담뱃가게에서 폴은 우연히 가게 주인의 사진 앨범을 보게 된다. 14년 동안 매일 오전 8시 가게 앞에서 찍은 사진이 담겨 있는. 그 속에서 폴은 아내의 얼굴을 발견한다. 폴은 사진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쏟는다. 사진이 찍힐 당시에는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돼버렸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도시의 풍경,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을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아무도 모르는 뉴욕》이 월스트리트, 자유의 여신상과 같은 뉴욕의 상징이 아니라 실제 뉴요커의 삶과 일상에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거창하지 않은 하루가 훗날 역사가 된다는 믿음이 책을 펴낸 계기가 됐다. 저자 윌리엄 B 헬름라이히는 4년 동안 9733㎞에 이르는 뉴욕 거리를 걸으며 수백 명을 만나고 인터뷰했다. 신발 아홉 켤레 밑창이 다 닳을 정도였다.

뉴욕을 정의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이민’이다. 책은 뉴욕을 “역동적이고 다양하며 놀라울 만큼 풍부한 사람과 마을의 집합체”라고 적었다. 지난 10년 동안 70만 명에 이르는 신규 이민자가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은 ‘멜팅 폿(melting pot)’이라는 건데, 어찌 보면 흔해 빠진 분석이다. 이 책의 매력은 분석이 아니라 디테일에 있다. ‘영어를 거의 못 하는 중국인이 퀸스에서 운영하는 할인점 쇼윈도에 놓여 있는 인형 데파 루시’ 같은 세밀한 묘사가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인터뷰와 거리 묘사를 간간이 인용하며 뉴욕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한다.

국경 밖에서 온 이민자뿐 아니라 뉴욕 바깥에서 들어온 ‘젠트리파이어’에 주목한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젠트리파이어는 쇠퇴한 구도심을 특색 있는 장소로 탈바꿈시킨 사람들을 말한다. 스러져가던 서울 을지로 골목을 ‘힙지로’로 변신시킨 대한민국의 MZ세대(밀레니얼+Z세대) 같은 사람들이다. 책은 젠트리파이어의 그림자도 함께 짚는다. 이들이 구도심을 번듯하게 변화시킨 게 임대료 상승을 불러 결국 이 지역 빈곤층을 더 싼 지역으로 내쫓았기 때문이다. 개발의 역설인 셈이다.

저자는 이민자 출신 사회학자다. 1945년 스위스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 자녀로 태어나 1946년 미국으로 넘어왔다. 뉴욕 맨해튼의 어퍼웨스트사이드에서 자랐다. 2020년 코로나19에 감염돼 생을 마감하기까지 뉴욕시립대 대학원 사회학 교수를 지냈고, 예일대에서도 강의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모든 역경을 넘어》 등 홀로코스트와 사회학 관련 책을 남겼다. 《아무도 모르는 뉴욕》 외에 《아무도 모르는 브루클린》 《아무도 모르는 맨해튼》도 썼다.

“오늘날 뉴욕은 대단한 르네상스를 누리고 있다”는 게 책의 결론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놀라운 추진력으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고, 이들에 대한 차별은 크게 감소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만 원서가 2013년에 나온 책이라는 걸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즈음에 나온 탓에 뉴욕의 풍경을 적지 않게 바꿔놓은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도, 코로나19 팬데믹 얘기도 담겨 있지 않다. 잠시 멈췄던 도시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있는 만큼 이 책이 제시한 다양성과 젠트리파이어 등의 키워드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다가올 뉴욕 역시 ‘아무도 모르는 뉴욕’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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