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국회 원 구성 시한을 제헌절인 오는 17일로 정한 가운데 반복되는 원 구성 지연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상임임원회 배분을 두고 반복되는 소모적 힘겨루기에 경제·민생 법안이 국회에서 검토조차 되지 못하고 있어서다. 원 구성 지연이 ‘일하지 않는 국회’ 모습을 심어줘 ‘정치 혐오’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매번 반복된 ‘지각 국회’
원 구성 지연은 정치권 내 고질적인 악습이다. 국회 사무처에 따르면 13~20대 국회에서 원 구성의 평균 소요 기간은 41.4일로 조사됐다. 후반기(평균 35.3일)보다 전반기(평균 47.5일)에 원 구성이 더 오래 걸렸다. 국회법상 시한을 준수한 경우는 임기 개시 9일 만에 문을 연 18대 후반기 단 한 차례뿐이다.가장 심했을 때는 14대 전반기 국회다. 원 구성에 125일이나 걸렸다. 1992년 5월 30일 임기를 개시하고 국회의장 선출에만 한 달이 소요됐다. 상임위원장 선출과 상임위 위원 배정은 이로부터 3개월이 지난 10월 2일에 끝났다.
당시 여야는 지방선거 시기를 두고 다퉜다. 야당인 민주당은 14대 총선과 14대 대선이 치러진 1992년 한 해에 지방선거도 같이 치르자고 주장했고,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선거 연기를 주장했다. 결국 지방선거를 1995년에 하기로 합의한 뒤에야 원 구성 협의가 시작됐다.
2008년 18대 전반기 국회 때도 원 구성에 88일이나 소요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이 뇌관이었다.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 고시절차에 들어가자 통합민주당 등 야권은 고시 무효화를 위한 장외투쟁에 나섰다. 이어 원 구성 협상 조건으로 ‘가축법 개정안’을 내걸면서 정국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이밖에 15대 후반기(1998년)는 원구성까지 79일, 20대 후반기(2018년)는 각각 57일이 소요돼 ‘지각 국회’는 고질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21대 후반기 국회는 왜 늦어졌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과 같은 ‘메가톤급’ 정치 이슈를 제외하고는 원 구성 지연은 대부분 상임위 배분 때문에 벌어졌다. 어느 상임위를 맡느냐에 따라 여야 간 정치적 셈법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이번 21대 후반기 원 구성 협상 초기에는 법제사법위원장 자리를 두고 여야가 다퉜다. ‘후반기 법제사법위원장은 국민의힘에서 맡는다’는 지난해 7월 양당 합의를 더불어민주당이 뒤집으려 하면서다.
법사위원장은 국회 본회의 표결 전 법률안의 최종 심사를 책임지는 자리로 원 구성 협상의 핵심으로 꼽힌다. 그동안 국회의장은 제1당이 하고, 법사위원장은 제2당이 맡는 게 국회 관례였다. 다수당이 두 자리를 모두 차지하면 소수당과 합의 없이 법안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중진 의원은 “이전 정권들을 보면 대통령 측에서 ‘법사위원장 자리는 꼭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가 내려올 정도로 원 구성 협상의 키는 법사위원장이다”고 말했다.
그런 관습은 21대 전반기 국회에서 깨졌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전체 300석 중 180석을 얻는 압승을 거두면서 법사위원장 자리까지 갖고 왔다. 이를 기반으로 임대차 3법을 처리하는 등 ‘입법 독주’ 비판이 불거지자 민주당은 후반기 국회에서는 법사위원장을 국민의힘에 내주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정권 견제’를 이유로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다시 가져가겠다고 나오면서 협상은 지연되기 시작했다.
지난 4일 여야가 김진표 국회의장 등 국회의장단을 합의했을 때도 법사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갈등은 식지 않았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후속 조치와 관련한 사개특위(수사사법체계개혁특위) 구성 협상과 맞물려 원 구성 협상은 더 복잡하게 꼬였다.
그러다 지난 12일 국회의장단 선출 뒤 처음으로 여야 원내대표가 만나 제헌절인 17일까지 원 구성을 마무리하자고 잠정 협의했다. 이어 지난 14일 여야가 사개특위 관련 잠정 합의에 이르면서 원 구성 협상에 속도가 붙었다. 사개특위 운영과 관련해 위원 정수는 여야 6명씩 동일하게 배분하고 위원장은 민주당이 맡되 '안건은 여야 합의로 처리한다'는 내용을 합의문에 넣기로 했다. 논란이 됐던 법사위원장은 여당에서 맡기로 했다. 법사위를 넘기는 조건으로 민주당이 제기한 법사위 권한 축소 등도 하지 않기로 했다.
과방·행안위 두고 막바지 ‘진통’
하지만 원 구성 시한을 이틀 앞둔 15일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와 행정안전위원회 배분이 협상 막판에 변수로 떠올랐다. 과방위는 KBS MBC 등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다루고, 행안위는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신설 논란과 관련이 깊어서 여야가 위원장 자리 쟁탈에 사활을 걸고 있다.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와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5일 오전 국회 본관 의장실에서 김진표 국회의장 주재로 30분가량 회동을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권 대행은 원내대책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에서 전날 협상 결렬 선언을 했기에 민주당이 결자해지해야 만날 수 있다”며 협상 지연 책임을 민주당에 돌렸다. 이에 대해 박 원내대표는 "국민의힘의 결자해지가 필요하다. 우리(민주당)로서는 협상 상대로서의 최소한의 도의나 신뢰가 있는 분들인가 싶다"고 비판했다.
여야는 과방위 행안위를 서로 양보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는 15일 “행안위원장, 과방위원장 자리를 당연히 집권여당이 맡아야 하지만 부득불 둘 중 하나는 양보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며 "그런데 민주당은 행안위원장, 과방위원장을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하면서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고 말했다. 반면 박 원내대표는 "윤석열 정권의 언론·방송장악 시도가 원 구성 협상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판했다.
과방위 행안위 배분 문제로 협상 기한 안에 협의가 이뤄질지는 불투명한 상태다. 다만 여야가 주된 쟁점인 사개특위 구성안에 합의한 만큼 이번 주말 중 극적 타결을 이룰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17일 협상이 타결되면 원 구성은 49일 만에 이뤄진다.
잠 들어 있는 민생 법안
정치권이 원 구성 협상을 두고 힘겨루기에만 몰두할 동안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상당수 민생 정책을 시행하려면 법을 고치거나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내놓은 유류세 인하 폭 확대는 교통·에너지·환경세법을 고쳐야 가능하다.정부가 최근 발표한 법인세 인하를 위해서도 국회가 법인세법과 소득세법을 개정해야 한다. 화물연대 총파업을 촉발한 화물차 안전운임제 일몰제 연장은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 사안이다. 종부세 완화, 부동산 관련 대책 역시 국회 협력 없이는 시행이 불가능하다.
여야가 서로 발족한 특위나 TF 활동 자체가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특위에 참여한 한 초선의원은 “정책은 정부가 발표하고 의원은 입법에 신경 써야 하는데, 원 구성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특위에서 활동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해법은 없을까
국회 공백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국회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앞서 이원욱 민주당 의원은 원 구성도 못 한 ‘유령 국회’에 대한 자성과 함께 하루 기준 약 42만원에 달하는 국회의원 세비를 반납하자고 제안했다.원 구성 지연이란 악습을 뜯어 고치기 위한 입법 논의도 활발하다. 김한규 민주당 의원은 14일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과 부의장, 상임위원의 임기를 후반기 원 구성이 될 때까지로 연장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 의원은 해당 법안을 '국회 개점휴업 방지법'으로 명명했다. 김 의원은 "여야 원 구성 협상 차질로 의장단이 공석이 되는 일이 4년마다 관행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업무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개정안을 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020년 4월 낸 '제21대 국회 원 구성 일정과 쟁점' 보고서에서 “원 구성은 국회가 입법 및 정책결정기관으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구조적 틀을 갖추는 것”이라며 “반복적인 원 구성 지연은 국민들에게 ‘일하지 않는 국회’라는 이미지를 심어줘 국회에 대한 신뢰를 저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의정 활동의 본질은 국회를 열어 상임위 활동을 통해 법안을 만들고, 정부를 상대로 정책 질의와 토론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정말 민생을 위하고 걱정한다면 원 구성 협상을 조속히 끝내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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