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첫 국가보훈처 정책자문위원장인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63·미국명 존 린튼)은 4대에 걸쳐 한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보훈 명가’의 후손이다. 광주 수피아여고 설립자인 유진 벨 선교사가 진외증조부(아버지의 외할아버지)이며, 조부(윌리엄 린튼)는 미국 애틀랜타 신문에 3·1 운동 관련 기고를 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부친(휴 린튼)은 6·25전쟁 때 해군 장교로 원산 전투 등에 참전했다. 인 위원장 역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통역을 맡고, 한국형 구급차 개발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12년 특별 귀화 1호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가 32년째 소장을 맡고 있는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에서 보훈 철학 등을 들어봤다.
▷문재인 정부 때 ‘김원봉 vs 백선엽’ 보훈 논란이 큰 이슈가 됐습니다. 우선 두 사람에 대한 생각부터 듣고 싶습니다.
“백선엽부터 보면 그는 일본 학교를 나왔고 친일한 게 맞습니다. 경력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6·25전쟁 참전 미군들은 그를 진심으로 영웅으로 생각합니다. 미군 대위로 장진호 전투 참전 용사인 제 외삼촌은 한국군은 욕해도 백 장군이 이끌던 제1사단은 ‘갓 댐, 굿 솔저스(대단한 군인들)’라며 극찬합니다.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린 소중한 인물입니다.”
▷김원봉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그분이 (독립운동가로서) 고마운 점은 이거고 지금 (대한민국의) 가치관에 비춰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은 이거다, 이런 식으로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오늘날까지 과거 기준의 가치관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고 들었습니다.
“1994년에 단둘이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만나자마자 ‘전두환에게 왜 보복 안 하느냐’고 다짜고짜 물었죠. 그때 돌아온 답이 ‘인 소장, 보복이란 것은 못 쓰는 것이여’ 하더니, 넬슨 만델라 강의를 30분 하더라고요. 1998년 대통령 취임식 때 전두환·노태우를 부르는 걸 보고 ‘저 사람은 용서를 아는구나, 한국에 희망이 있구나’ 뭉클해집디다.”
▷김대중이 가장 미워할 사람으로는 박정희도 있는데요.
“오늘날의 한국을 만든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박정희와 기업가들, 둘째는 하루 16시간씩 일했던 근로자들, 셋째는 근검절약하면서 자식 교육에 헌신한 어머니들 덕입니다. 박정희는 전쟁 후 다들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을 때 ‘우리가 잘살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한 분입니다.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는 자신의 회고록에 ‘박정희는 나의 스승’이라고 썼습니다. 중국에 박정희 연구소가 10개가 넘는다고 해요. 덩샤오핑도 박정희의 제자인 셈이죠.”
▷김대중을 존경하면서 박정희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 눈에는) 제 자체가 모순이죠. 우파는 말이 안 된다고 하고, 좌파는 어떻게 박정희도 좋아할 수 있냐고 하죠. 한국 사람들은 ‘도매금’ 성향이 있어요. 생각이 달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생각이 다르면 사람을 통째로 미워해요. 링컨이 헌법을 76번이나 위반했지만, 미국인들이 용서하는 건 ‘연합’을 지켜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 다음으로 존경합니다.”
▷말씀대로 분열과 ‘편 가르기’가 한국 사회의 큰 문제입니다.
“연세대 설립자인 언더우드 가문이 모여서 회의하는데, 형제 둘과 아버지가 정말 엄청나게 싸우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논쟁하고 투표하고 나와선 서로 등을 두들겨 주더라고요. 죽기 살기로 싸웠는데, 결론을 내고는 털어버리는 거예요. 국회의원들이 왜 공개적으로 싸웁니까. 자기들끼리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싸우고선 절충안을 가지고 나와야죠. 그러니 존경을 못 받지요.”
▷보훈처 정책자문위원회 운영에도 좋은 참고가 될 얘기 같습니다.
“이제 한국도 여유가 생겼으니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빠짐없이 챙겨야 할 때가 됐어요. 북한 사람들이 ‘뼈다귀 부대’라고 하는 미군 유해 발굴부대는 북한까지 가서 유해를 파오잖아요. 외국에 나가 있는 국가유공자 후손도 빠짐없이 챙길 생각입니다. 제가 할 일은 위원회에서 ‘우리 서로 미워하지 말자’며 서로 다른 의견을 톤다운시켜 합의점을 끌어내는 것이죠.”
▷BTS 병역 문제 같은 것도 의견이 엇갈리는데,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한민국을 위한 게 뭔지, 냉정히 국익을 따져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BTS라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브랜드 파워를 감안할 때 저는 봐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책자문위원장 선정 배경에 광주민주화운동 참여 경력도 있습니다.
“1980년 연세대 의예과에 입학했는데, 그해 고향 순천에 갔다가 광주 5월 항쟁 소식을 들었습니다. 광주로 가서 타임, 뉴스위크, 워싱턴포스트 등 외국 기자들을 만났고,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했더니 통역해달라고 해서 해줬습니다. 그 뒤 ‘데모 주동자’로 찍혀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추방 압박도 받았어요. ‘빨갱이’ 소리가 듣기 싫어 외국인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시 문무대(병영 체험훈련)에 입소했습니다. 대한민국 군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느꼈고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집안이 보훈 명가인데, 특별한 가훈 같은 게 있습니까.
“기독교 사상의 핵심은 크게 ‘원칙’과 ‘사랑’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사참배는 금지가 원칙이라면 절대 안 해야 하는 것이고, 공산주의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게 원칙이면 굴복해선 안 되는 것이죠. 할아버지는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해 추방됐습니다. 아버지와 외삼촌들도 6·25전쟁에 장교로 참전하셨고요. 여순사건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가 가장 존경하는 기독교인입니다.”
▷한국인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한국인들은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합니다. 미국 백화점에 가면 한국의 삼성, LG 텔레비전이 일본 제품들을 몽땅 몰아냈어요. 현대자동차가 글로벌 금융위기 때 소비자 불안심리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은 하버드 경영대학원(MBA)에서 케이스 스터디로 가르칩니다. 인류 역사가 지난 50년 동안 가장 큰 발전을 이뤘는데, 한국이 단연 돋보인 나라 아닙니까. 다만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야 해요. 한국 정치권은 의견이 충돌하다가도 타협하는 법을 꼭 배워야 합니다.”
정리=김동현 기자 3cod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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