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 인력난에…K제조업 지탱하던 납기준수·품질 경쟁력 '흔들'

입력 2022-07-17 17:33   수정 2022-07-25 16:40


“한국 제조업은 철저한 ‘납기’ 준수와 높은 ‘품질’이 가장 큰 경쟁력이었는데 이제는 둘 다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 조선업체 사내 협력사 대표는 “일할 사람이 없어 대형 조선사(원청사)에 일감을 반납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조선업계는 역대 최악 수준의 인력난이 자칫 대규모 납기 지연을 촉발해 선박 인도 지연에 따른 거액의 지연배상금 지급과 연쇄 발주 취소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조선업계뿐 아니라 57만 개 중소 제조업체 전반이 일손 부족으로 비상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중소기업의 미충원 인력은 16만4000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6만8000명(71.3%)이나 늘었다.
인력난 탓 조선 협력사 ‘줄부도’ 위기
17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국내 대형조선 5개사의 사내 협력사에서 올 들어 7월 중순까지 7000명 이상이 퇴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임금이 많고 수도권에서 생활할 수 있는 반도체 공장 공사 현장이나 물류업계로 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인 근로자들도 일당이 높고 주 52시간제를 적용받지 않는 농어촌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내 대형 조선소에서 활동하는 450여 개 사내 협력사를 대표하는 김수복 조선 5사 사내협력사연합회장은 “조선업계가 외부적으로는 사상 최대 수주를 기록했다고 자랑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주 52시간제 제약과 낮은 납품단가 영향으로 협력사의 인력난과 경영난이 심화하고 있다”며 “인력이 급속하게 외부로 빠지면서 최근 3년간 협력사의 60%가 부도 위기를 맞아 대표가 바뀌었고 전체 600여 개 사내 협력사 중 200여 개 업체가 폐업했다”고 전했다.

조선 5개사 사내 협력사들은 최근 고용부, 법무부 등에 외국인 근로자 도입 쿼터 제도 폐지와 중대재해 발생 시 작업 중지 기간 최소화 등을 건의했다.

한 달 이상 이어지고 있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금속노조 주도 불법 파업(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은 인력난으로 고전 중인 협력사의 등에 칼을 꽂았다. 도크가 불법 점거되면서 남아 있던 근로자의 일감마저 줄었기 때문이다. 한 대우조선해양 사내 협력사 대표는 “민주노총이 전체 근로자의 1%도 안 되는 인원(100여 명)으로 불법 파업을 벌이면서 100여 개 사내 협력사의 근로자 1만1000여 명이 큰 고통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건설장비 등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드는 주물업계도 일손 부족 탓에 심각한 ‘매출절벽’ 위기를 맞았다. 한 주물업체 대표는 “불법체류자조차 구하지 못할 정도로 인력 부족이 심각하다”며 “80~90%가 나와야 정상인 업계 공장 가동률이 대부분 50~60%인 상태”라고 말했다. 경기지역 한 주물업체 대표는 “20~30대 청년을 채용하면 70%가 3개월 내 퇴사한다”며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데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으로 밤샘 작업도 할 수 없어 납기를 맞추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토로했다.

제조업의 마무리 공정을 담당하는 도금업계 사정도 비슷하다. 박평재 한국표면처리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인력난이 장기화해 뿌리기업이 무너지면 스마트폰과 자동차부터 선박, 기계, 항공기 부품까지 산업계 전 분야의 생산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고령화·임금 구조 얽힌 복합위기
인구구조 변화도 중소기업의 인력난 개선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상당수 뿌리기업의 생산직 평균 연령이 50~60대일 정도로 중기업계엔 ‘젊은 피’ 수혈이 원활하지 않다. 설상가상 국내 생산가능인구가 줄면서 인력난이 가중될 전망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인구 가운데 5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2년 23%에서 2020년 42%로 늘었지만, 청년층 비중은 23%에서 15%로 감소했다. 고용부가 지난 2월 공개한 ‘2020~2030년 중장기 인력수급 전망’에서도 2030년까지 15~64세 생산가능인구가 320만 명 감소할 것으로 점쳐졌다.

대기업과 플랫폼, 게임, 암호화폐 분야 일부 정보기술(IT) 기업의 급격한 임금 인상이 ‘탈(脫)중소기업’ 현상을 가속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통섭 비전세미콘 대표는 “애써 우수 인력을 키워놔도 몇 년 안에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하는 업체들에 뺏기기 일쑤”라고 한탄했다. 한 IT 장비 제조업체 대표도 “대졸 신입은 연봉 5000만원, 10년차 경력자는 1억원을 주는데도 대기업이 연봉을 30%씩 올려서 데려가 버린다”고 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는 3년 전보다 심화했다”며 “중소기업이 중견·대기업으로 클 수 있는 성장 사다리가 끊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대규/김진원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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