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에 대한 미국 CNN 방송의 평가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5~16일 취임 후 처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습니다. 인권 문제를 놓고 사우디아라비아와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어왔지만 40년 만의 최악의 인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증산이 필수적이란 판단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소득은 없었습니다. 대신 자신이 직접 '국제적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던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입지만 강화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양국 관계 악화에 기름을 부은 것은 카슈끄지 암살 사건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인사이자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카슈끄지는 2018년 10월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총영사관을 방문했다 암살당했는데,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암살 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019년 11월 대선 후보 시절 이 사건을 두고 "사우디에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국제적으로 왕따(pariah)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한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으로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습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전제군주제 국가인 사우디라비아에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실권자입니다.
외교 관계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등 가치를 내세운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에도 대(對)사우디 적대 정책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권을 앞세워 사우디아라비아를 압박한 것인데요. 하지만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상황이 역전됐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쟁 발발 직후 국제사회의 거듭된 석유 증산 요청을 계속 거부했습니다. 지난 3월 빈 살만 왕세자가 바이든 대통령의 통화 요청을 거부했다는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도 나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사우디에 백악관 에너지 특사 등으로 구성된 고위급 대표단까지 보냅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바이든 대통령이 처음으로 직접 방문까지 했지만 결국 빈 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성과도 없었는데, 바이든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와의 '주먹인사'까지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습니다. 카슈끄지가 칼럼니스트로 일했던 워싱턴포스트의 프레드 라이언 최고경영자(CEO)은 "치욕스럽다"고 비판했고,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인권 옹호자로서의 바이든 대통령의 명성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5일 빈 살만 왕세자와의 회담 직후 기자들에게 "카슈끄지 문제는 회담 모두에 제기했으며 그때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밝혔다"고 말했지만, 사우디 외무장관은 바로 다음날 미국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카슈끄지 관련) 특정한 문구를 듣지 못했다"고 직접 반박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귀국 직후 기자들에게 이에 대한 쏟아지는 질문에 "아니다"고 해명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주먹인사 논란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자 "왜 더 중요한 것을 묻지 않느냐"고 발끈하기까지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SNS 상에서는 빈살만 왕세자가 바이든 대통령 면전에서 비웃는 듯한 모습까지 확산됩니다. 회담 현장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향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직도 왕따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빈 살만 왕세자가 옅은 미소를 띠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기 때문입니다. 외신들은 앞다워 이를 '비꼬는듯한 웃음'이라 표현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와의 정상회담 외에도 이번 사우디 방문 중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들과 정상회의를 갖고 "국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충분한 공급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데 우리는 동의했다"면서 "에너지 생산업체들은 이미 증산했으며 향후 수개월 간 벌어질 일에 대해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회적으로 석유 증산을 촉구한 것인데요. 그런데 빈 살만 왕세자가 여기에 대고 "사우디는 이미 최대 생산 능력치인 하루 1300만 배럴까지 증산 계획을 발표했고 이를 넘어서는 추가 생산은 불가능하다"고 일축해버립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귀국 후인 지난 18일 장-피에르 미 백악관 대변인은 언론 브리핑에서 "우리는 앞으로 보름 내에 회담의 성공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중동 산유국들의 원유 증산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과 기타 산유국 간 협의체인 OPEC플러스가 증산에 나서는 희망만을 계속 언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파이살 빈 파르한 알사우드 사우디 외무장관은 별도 기자회견에서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원유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며 "OPEC과 OPEC플러스가 시장 상황을 계속 평가하면서 필요한 조처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애간장만 태우고 있는 것이죠.
국제 유가는 실제로 오랜 시간 동안 사우디의 입김에 휘청여왔습니다. 코로나19 대확산 초기이던 지난 2020년이 대표적입니다. 코로나19로 석유 수요가 급감하자 연초 50~60달러를 맴돌던 유가는 40달러대까지 추락했습니다. 당시 OPEC플러스는 석유 감산을 위한 긴급 회의에 돌입했지만 러시아는 감산에 반대합니다. 미국 셰일석유 업계의 투자 강행과 코로나19로 인한 시장의 불확실성 등을 이유로 내세웠는데요. 이에 격분한 사우디아라비아는 되레 증산에 나서며 러시아를 압박했습니다. 사우디와 러시아 간 유가 전쟁은 결국 미국의 셰일석유 산업을 파산 위기로 몰아넣었고, 4월엔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장중 -40달러라는 전무후무한 가격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중동 국가들이 석유를 무기화한 1970년대 오일 쇼크 때는 말할 것도 없죠. 1960년 창설된 OPEC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대대적인 석유 감산 조치로 전 세계를 오일쇼크로 몰고 간 적 있습니다. 이 OPEC 창설을 주도한 나라이자, OPEC 주도의 석유 감산을 주도한 나라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입니다. 사우디는 증산 결정은 다음달 3일로 예정된 OPEC플러스 회의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이 OPEC플러스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은 숨긴 것이죠.
오랜 시간 미국의 제재로 대표적인 반미 국가인 이란은 최근 급속도로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란은 지난 5월 러시아로부터 밀 등 곡물 500만t을 공급받은 대신 서방 제재의 우회로를 마련하는 방안까지 논의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 러시아와 밀착 행보를 보이던 튀르키예는 전쟁 발발 이후엔 서방 국가들과 러시아 사이에서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해왔습니다. 러시아는 자국 입장에서 이번 전쟁의 유일한 중재자인 튀르키예를 자국 편으로 끌어들여 역내 영향력을 제고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유탄이 국제 유가에 직격타로 작용하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과 러시아 사이의 냉전 전선이 중동 지역으로 내려오는 양상입니다. 미국과 러시아 간 힘겨루기가 거세지는 가운데 다음달 3일 31차 OPEC+3 회의가 국제 유가 흐름의 분수령이 될 전망입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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