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반체제 작가 ‘반디’의 소설과 시가 《김일성 전집》 안에 숨겨져 반출돼 전 세계로 번역 출간되었다는 것과, 그가 북한 다음으로 ‘안 유명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은 슬픈 아이러니다. 이 얼굴 없는 작가에게는 본명도 없다. 필명 반디는 ‘반딧불이’를 뜻하는데, 이건 필명이 아니라 암호명이 맞다. 누군지 드러나면 죽기 때문이다. 해외언론들처럼 그를 ‘한반도의 솔제니친’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반디가 솔제니친보다 뛰어난 작가여서가 아니라, 솔제니친이 겪은 고통이 반디의 그것보다 훨씬 초라해서다. 사람 살기가 지금의 북한에 ‘비해’ 그때의 소련은 천국이었다. 저항세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솔제니친은 유배지에서도 집필이 가능했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 브레즈네프의 반스탈린 정책 탓에 더 편했다. 소련 지도부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폐기하고 러시아정교로 나라를 다스리라는 서한을 보낼 정도였으니까. 소련이 1970년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이 골칫덩어리를 1974년 서독으로 추방하자 그는 미국에 정착해 서방세계의 찬란한 대접을 받다가 1990년 소련 국적을 회복하고 1994년 러시아로 귀국해서는 TV토크쇼까지 진행하며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옐친을 지지해주다가는 싸늘하게 돌아섰고, 푸틴을 강력하게 밀어주다가 90세에 심장마비로 자연사했으니 작가로서나 인간으로서나 그의 역경은 가성비가 최고였다. 문인치고 솔제니친과 인생 바꾸고 싶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반면, 1950년생 반디는 살아있다면 현재 72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2016년 무렵부터 비밀연락망으로도 실종 상태여서다. 그의 소설집 《고발》 속 ‘빨간 버섯’에는 운동장에서 공개재판을 받던 남자가 실성해 빨간 벽돌 시당위원회 청사를 ‘빨간 독버섯’이라며 어서 뽑아버리라고 실실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다. ‘지척만리’의 주인공은 인민학교 5학년 봄날 전교생이 탈곡장에서 공개처형을 봐야 했던 걸 회상한다. 요란한 총성이 고막을 찢고, 총구멍이 난 시체보다 그것을 묶고 있던 피묻은 포승줄을 안전원이 다시 주머니에 쓸어 넣는 게 더 무서워 밤마다 가위에 눌린다. 북한에서의 강제수용소, 인민재판과 공개처형은 사법제도가 아니라 비일비재한 사상교육 수단이다. 당장 우리는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북한 지하교회의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바깥 세계에 전하는 동영상들을 볼 수 있다. 짐승이 파놓은 굴 같은 곳이 그들의 교회이고 성경이 없어서 공책에 필사한 성경구절들을 읽으며 “여기는 참혹한 어둠뿐입니다, 하나님.” 그러며 기도하는 울음 섞인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줄줄이 끌려나와 말뚝에 포승줄로 묶인다. 노동당 간부가 그들의 죄를 읊고 병사들이 거총을 한다.
정약종은 죽는 순간 정말 그랬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북한 지하교회 신자들이 총소리가 터지기 직전 “주여!” 하고 외치는 것을 보고 들었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또한 나는 정의롭지도 않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그 크고 많은 교회들과 천주교와 정의구현사제단과 민주화세력들이 저 지옥 같은 곳에서 울부짖는 형제 자매 들을 못 본 체하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시대정신’은 통일이 아니다.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북한의 자유민주화’다. 이 여름밤 반딧불을 보게 되면, 우리는 총소리에 파묻히는 사람들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