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른바 ‘취약계층’의 부채 경감 방안을 내놨다. 미국을 필두로 세계적인 금리 올리기 추세로 대출 금리가 빠르게 상승하자 서민 금융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차원이다. 대통령 주재의 비상경제민생회의(제2차)에서 논의된 내용을 보면 소상공인과 자영사업자, 저신용 등급자, 청년층에 대한 금융지원이 포함돼 있다. 논란의 핵심은 빚 탕감이다. 대출의 상환유예 정도가 아니라, 아예 원금을 깎아주겠다고 하면서 “빚을 낸 코인 투자자까지 왜 보호하느냐” “성실히 빚 갚아온 사람은 뭐냐”는 반발도 생긴다. 전형적인 금융의 모럴해저드 논란이다. 반면 이례적인 인플레이션에 일자리 창출도 한계를 보이고 있는 만큼 정부가 나서 취약층에 실질적 도움이 될 정도로 금융지원을 해야 한다는 요구도 적지 않다. 경제 위기감이 고조되는 와중의 영세사업자와 청년층 등을 향한 빚 탕감, 어떻게 볼 것인가.
매달 늘어나는 금융 부담에 속수무책인 취약층의 대출 원금 및 이자 상환 부담을 줄여주는 게 맞다. 실제로 원리금을 갚느라 생활이 어려운 서민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부도가 나고 상환이 완전히 어려워지는 신용불량자가 되면 사회적으로 더 큰 부담을 안게 된다. 실업자부조 등 극한계층 직접 지원금이 늘어나면 모두 정부 예산 지출 증가로 이어지고, 사회적 불안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전에 막을 필요가 있다. 정부가 30조원 규모로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채무를 조정해주는 게 오히려 적은 비용으로 큰 파국을 예방하는 방편이 된다.
미국에 이어, 그동안 금리를 올려온 한국은행이 7월 들어서는 한 번에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사상 처음으로 단행하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가 당분간 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불가피하게 고금리를 택했지만, 늘어나는 대출 이자 부담은 취약층일수록 커지는 역설적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사정이 매우 어려운 자영업자와 청년층을 대상으로 직접 지원에 나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금융 리스크는 뒷수습보다 선제적 적기 조치가 긴요하다”고 역설하지 않았나. 정부 주도의 30조원 규모 ‘배드뱅크’는 무조건 원금 탕감이 아니라 채무조정, 장기 분할상환 같은 방식도 병행하며, 한시적으로 운용된다.
그렇다고 해서 금융소비자에게 모럴해저드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 정부 조치대로라면 90일 이상 연체자에게 적용하는 ‘새출발기금’은 쉽게 말해 대출 원금의 60~90%를 탕감해주는 것이다. 성실하게 대출금을 갚아온 건전한 소비자에게 너무 큰 상대적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성실 상환자에게 박탈감을 주게 된다. 비슷한 일을 상시로 하는 캠코의 부실채권 감면율(30~60%)과 고려해도 형평에 맞지 않다. 재검토가 필요하다. 저신용 청년의 빚을 30~50% 깎아주는 ‘청년특례 신속채무조정’ 프로그램도 문제가 다분하다. 청년층에서는 바로 “빚을 내 무리하게 코인과 주식 투자에 나섰다가 실패한 이들의 빚을 정부가 왜 깎아주느냐”는 문제제기가 나왔다. 젊은 대출자라는 이유로 과도한 혜택을 준다면 ‘정치적 선심’, 즉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정부 독주의 강압 분위기도 보인다. 대출자마다 다르게 적용될 새출발기금의 60~90% 원금 감면율을 어떤 기준으로 세분화할 것인가. ‘주거래 금융기관 책임관리제’ 등 일부 실행 각론에서 협의가 없었다며 은행들이 볼멘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관치금융 성격이 짙다. 한국은행이 사상 처음으로 금리 빅스텝을 내디딘 바로 다음날 충분히 정제되지 못한 내용을 내던진 것도 정책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금융·경제위기는 아직 본격 시작도 안 했다. 그런데 선심책부터 내면 누가 허리띠를 죌 것이며, 나중에는 어떤 정책을 펼 텐가. 금융 시스템 안정 차원에서 서둘러야 한다고 판단했을 수는 있다. 그럴수록 금융회사와 머리를 맞대고 차분히 해법을 찾아야 한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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